매조지 없는 콩트의 반복이다.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갈채를 받을 즘, 민망하게도 만여 명의 이름이 게재된 명단이 나라를 뒤흔들었다. 추잡스런 미명 아래 검열과 감시의 대상이 됐음에도 당사자들의 담담한 반응만이 줄을 이었다. 확신의 계기였을 뿐, 이들에게는 이미 일상이었다. 과거의 발언으로 국정감사라는 도마 위를 오르내린 이의 발끈하는 태도가 오히려 신선했다. 물론 가용시간이 한정됐던 도마는 싱크대로 직행했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명단 속 예술가가 백여 명이 넘는다는 조악한 변명 역시 침묵으로 사그라들었다. 정작 주인공은 등장하지 않고, 블랙리스트 속 잠정적 이슈메이커들만이 표지를 장식한다. 하나의 콩트는 그런 식으로 막을 내린다. 이것이 5년의 서사가 옴니버스를 확장하는 방식이다.
  필요할 때만 비춰지는 것. 대한민국이라는 무대에서 현 정권이 굳건하게 자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세월호로부터 시작된 그들의 위기는 위안부 합의와 故 백남기 씨 사건을 거쳐 정윤회, 최순실, 차은택 등으로 절정을 맞았다. 허나 매 장에서 보여준 책임 회피는, 무엇에도 순응하지 않는 무소불위의 정권을 표방하며 그 위용을 뽐냈다. 가장 애용하는 것은 침묵이요, 해외도피도 빈번하다. 조금 번잡스러울 땐 국가 안보 운운하며 ‘불순인자’를 배제해내는 것도 즐겨하는 방식이다. 앞서 언급한 블랙리스트 역시 포장을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 덕분에 무엇도 갈무리된 것 없이, 옴니버스의 각 장을 흘려보냈다. 기가 막히게 조명을 다루는 솜씨에 혀를 내두를 정도니, 이쯤 되면 홍성담 화백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해서 정권을 유지해야 마음이 편할 정도가 되니 무도하고 무능”하다는 발언이 무색하다.
  조명받기 위해 싸우는 이들이 있다. 각 장에서 새로이 등장한 이들은, 정권이 임의로 내려친 암막 속에서 나부끼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끝나지 않는 전쟁 속에서 피폐해지고, 故 백남기 씨 가족들은 눈물의 기자회견을 반복하고 있다. 수요집회는 1,252차를 넘어섰고, 성주 주민들의 사드 배치 철회 집회도 어느덧 세 자리 수에 가까워졌다. 진실을 위해 계속 몸부림치지만 ‘교통사고’나 ‘병사’ 따위의 무감한 명명으로 남아있던 조도마저 잃어간다. 슬픈 조명은 순간에만 비춰질 뿐이었고, 정작 필요할 때에는 추악한 손에 의해 틀어졌다. 암담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서 ‘우리’의 외면은 더욱 큰 좌절만을 안겼다. 손길에 우롱당하며 ‘이들’과 선을 그었고, 새로운 장들이 펼쳐짐에 뒷전으로 밀어내기 바빴다. 편입하지 않은 채 희극을 영위하는 것만이 ‘우리’의 위안이었을까.
  사실 우리에게 이들을 타자화할 권리 따윈 없다. 애초부터 간극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 모두 같은 곳에 서있다. 이들의 자의적이지 않은 등장이야말로 무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리라. 남 일이라 치부하며 외면하기엔 지극히도 현실이다. 언제 다가올지 모를 차례에 두려워만 할 뿐, 맞닥뜨리지 않았기에 오히려 애처로운 사정이다. 우리가 결정을 미루고 있는 와중에도 장은 넘어가고 새로운 콩트가 등장한다. 비극은 계속해서 희극으로 포장되고, 옴니버스는 날로 비대해지고 있다. 결말을 짐작할 수 없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것도 없다던데, 딱히 그렇지도 않다. 유난히도 긴 5년 서사에, 엔딩 크레딧이 아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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