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이 끝나가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십여 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후 한동안은 활동도 하시고 지내셨지만, 5년 정도 전부터는 말씀도 잘 못 하셨고, 3년 전부터는 거의 아이 같은 모습으로 조용히 미소 지으며 앉았다 누웠다만 반복하고 지내셨다. 외출은 일요일 날 성당에 휠체어로 가는 것이 전부였다. 어머니와 첫째 동생이 아버지랑 같이 지내며 모든 삶을 함께하였다. 할머니는 6·25전쟁 통에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어린 아버지를 데리고 함경도에서 내려와서 서울에 정착하셨다. 어려서부터 가난과 삶의 부조리를 경험한 아버지는 세상을 개혁하는 혁명가가 되겠다는 꿈을 꿨고, 꿈을 위해 오직 공부에 매진했다. 할머니가 채소를 팔아 번 돈으로 유학을 간 아버지는 동경대로 유학을 갔는데, 그곳에서 아르바이트 한번 하지 않고 공부만 했다. 할머니가 몇 정거장을 버스 안 타고 걸어서 모은 토큰 값까지도 유학비로 보내주는데, 이런 할머니의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고 믿었다. 그런 그를 보고 당시 지도교수였던 쯔지선생은 ‘마치 지금 일본에서는 이미 사라진 명치유신 시대의 지사를 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랬다. 아버지는 평생의 삶의 신조가 ‘금욕’과 ‘소신’이었다. 아버지는 이화여자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로 사셨는데, 평생 이러한 삶의 신조를 지켰다. 에어컨도 없고 비가 새는 집에서 평생 살았고 택시도 타지 않고 항상 버스와 전철만 탔다. 매일 똑같은 아령 운동과 냉수마찰을 하였고 규칙적으로 살았다.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나가서도 항상 권력자나 선동가에 대항해 소신 있게 발언을 했고 그래서 당시 많은 소시민들의 인기도 얻었다. 하지만 그래서 그와 사상이 맞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협박과 테러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검소함과 금욕으로 스스로를 규제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한편으로 어머니는 힘들었고 아들들과도 충돌하는 경우가 있었다. 가족 모두는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과도한 금욕정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20여 년 전 내가 미국 유학을 떠날 당시에도 아버지와 여러 가지로 충돌이 많던 시기였다. 소위 예술가로서의 자유로움이 필요했던 나와, 항상 삶을 규율하는 아버지의 사고는 정반대였고 나는 답답함에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렇게 미국으로 가고 15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나는 예술가로서 자유롭게 성장했고, 가끔씩 만나거나 연락을 하게 된 아버지와는 그냥 좋은 관계였다.
귀국하여 자리 잡고 내 삶에 매진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버지는 조용한 아이처럼 되어갔고, 엄하고 강했던 패기는 사라졌다. 동생과 어머니가 아버지를 돌보느라 고생했는데, 그 당시 이미 치매로 10년 이상을 누워계신 할머니까지 계셔서 그들의 노고는 감히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조용해진 아버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가끔씩 밝은 얼굴로 만났지만 무언지 내 마음속에는 아버지가 저런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분노가,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다 정리하지 못한 감정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다.
입관하던 날, 눈물로 목이 메었다. 아직 못다 한 말과 감정이 남아있었는데. 내게 주어진 시간은 많았건만 나는 하지 못했다. 뜨거운 눈물만 계속 흘렀다.

김정권(음악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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