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의 <밀정>을 보러 가는 길에 주제넘게 걱정에 휩싸였다. 이 영화는 최동훈의 <암살>로부터 몇 발자국이나 떨어져 있을까? 두 영화가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심지어는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라는 점에서 기대보다 조바심이 앞섰다. 그건 <암살>이(뛰어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작품성을 가진 영화이기 때문도 아니고 천만 영화의 대중적 파급력(이건 뛰어넘기 힘든 대목이다)이 가진 흥행의 압력 때문도 아니다. 실은 비슷한 영화를 이미 넘치도록 보았다는, 이상한 기시감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최근 한국영화감독들의 관심이 일제히 일제식민기에 몰려 있는 느낌이다. <밀정>을 포함하여 <암살>, <경성학교>, <동주>, <아가씨>, <덕혜옹주>까지 최근 1, 2년 사이에 7편의 영화가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질문은 바뀐다. 동시대 한국감독들은 왜 일본강점기에 매혹되었는가.
영화감독의 입장에서 일본강점기는 흥미로운 시기다. 사라진 조국, 잃어버린 언어, 목숨을 건 영웅적 행위, 그에 반하는 친일 행각, 만주를 오가는 국제적인 스파이 활동, 비장한 독립군, 참혹한 민중의 삶, 암살 작전, 체포, 그리고 영웅적인 죽음.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스펙터클과 맞물리는 내셔널 시네마의 가능성이 여기 있다. 그리고 이전 시기 한국영화가 잊고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이 여기에 덧붙는다. 이 시기는 모던보이와 모던 걸이 등장하는 근대의 원풍경이 펼쳐지던 때다. 그래서 최근 영화에서 그 비극적인 시대는 울분과 분노만큼이나 낭만과 향수도 어른거렸다. 말하자면 익숙하면서도 낯선, 어쩌면 이국적이라 할 만한 시각적 매혹이 거기 있었다.
<암살> 속 이국의 상품으로 가득한 그 휘황찬란한 백화점, 내일 죽을지 모르지만 오늘은 커피를 홀짝이며 모던보이와 모던걸로 살아가는 젊은이들. 그들이 꾀한 민족적 거사는 서구영화의 액션 스펙터클을 이 땅에서 구현한다. 이중 가장 이상한 영화는 <경성학교>인데, 여기서 병약한 피식민 소녀들의 육체는 초근대의 신체 개조적 열망을 담는 그릇이 된다. 음습한 실험이 이뤄지는 여학생 기숙학교, 억압된 조국 경성을 벗어나 제국의 중심으로 입성하려는 소녀들의 꿈, 실험실 수조에 박제된 오싹하고 아름다운 이미지가 안기는 시각적 외상. <경성학교>의 소녀들은 공포영화와 판타지의 세계에서 곧장 세월호의 아이들과 기묘하게 접속된다. 반면 <아가씨>의 탈정치적인 공간은 극도로 그로테스크하고 탐미적인 욕망의 세계와 연결된다. 음란소설의 낭독회가 열리는 부르주아들의 은밀한 서재, 서로의 비밀을 간직한 채 낯선 성적 탐험을 강행하는 그녀들의 침실, 일본어와 한국어가 경계 없이 뒤섞이듯 서구와 동양의 건축양식이 뒤섞인 대저택. <동주>는 차라리 그 모든 공간의 시대성을 지워버리고 단 하나, 흑백 필름을 택함으로써 시대의 향수를 끌어내려 했다. 윤동주라는 낭만적인 시인의 낭만적이지 않은 삶을 통해, 시대와 불화하는 예술과 예술가의 초상을 통해서.
<밀정>의 시각적 매혹도 이와 다르지 않다. 상하이와 경성의 음영 짙은 밤 골목, 1등석과 3등석으로 대비되는 흥미로운 열차의 미장센, 적인지 동지인지 알 수 없는 존재들 사이를 오가는 술잔들, 느와르 스타일에 담긴 시공간의 무드. 그러나 <밀정>에는 일제강점기를 다룬 다른 영화에는 없는 것이 있다. 제국주의 일본이라는 외부의 적과 친일파라는 내부의 적, 그러니까 두 개의 명확한 적이 일제강점기 영화의 쾌감을 끌어내는 하나의 토대라면, <밀정>에는 그 내부의 적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 최초의 한국영화가 아닌가 한다. 적이지만 동지인 것도 같고 동지라고 믿고 싶지만 적일지도 모를 그런 존재. 그는 내내 애매모호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물들의 시선, 혼란으로 난처해진 얼굴. 내 생각에 <밀정>의 가장 매혹적인 이미지는 그 시선과 얼굴의 모호함에 있고, 그게 이 영화를 다른 자리에 갖다 놓았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영화의 본질적인 매혹은 결국 그 질문에서 온다.

강소원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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