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영
소설가

  지난 9월 12일, 지진이 일어났을 때 나는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평일 저녁인데도 마트 안은 추석 준비를 하는 사람들로 제법 붐볐다. 꿀렁, 콘크리트 바닥이 움직였다. 사람들이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요동쳤고, 선반 위의 물건들도 빨랫줄 위에 널린 수건처럼 흔들렸다. 애호박을 고르고 있던 나는, 그 몇 초 안 되는 순간이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흔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슬로우모션으로 찍은 영화처럼 느리게 보였다. 무언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두 번째 지진이 왔을 땐 출입문 근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장을 다 본 후 집에 가기 전 잠시 쉬는 중이었다. 첫 진동에 놀랐음에도 설마 또 지진이 올까 하는 의심과 여전히 마트 안을 채우고 있는 인파를 보며 어느 정도는 안심을 해서였다. 의자가 흔들렸다.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한 의자는 계속해서 흔들렸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출입문으로 뛰어갔다. 그때서야 나는 내 안전불감증을 자책했다. 첫 지진이 왔을 때 집에 갔어야 했는데. 계속해서 장을 보는 게 아니었는데. 카트 속에는 소고기와 애호박, 만두, 콩나물 등이 엉망으로 엉켜 있었다.
집으로 간다고 해서 안전할까?아파트도 흔들렸을 건데. 지진이 또 오면 어디로 가지 ?생필품과 햇반, 통조림 반찬, 물이 든 보온병과 여벌 옷을 챙겨 생존 가방을 싸 둘까? 이제 끝났는데 너무 호들갑 떠는 건 아닌지. 마트를 나와서도 내 불안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밤이 깊을수록 상상력을 더한 불안과 공포는 진폭을 달리 하며 확장되었다. 그 상상력의 끝에 가닿은 것은 원자력발전소였다.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 (1954)는 핵전쟁 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남자의 생존기다. 변종 바이러스가 만들어낸 병으로 인해 세상은 흡혈귀로 가득 차게 된다. 낮에는 힘을 잃고 누워있지만 밤만 되면 돌아다니는 흡혈귀는 한때는 로버트 네빌의 다정한 이웃이자 친절한 동료였던 이들이다.
이 소설은 좀비호러 영화의 기념비적 작품이라 일컫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의 주요 모티브가 되었으며, 2007년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 <나는 전설이다>로 만들어졌다. 소설 속에서 ‘흡혈귀’로 정의한 존재는 조지 로메로 감독에 의해서 ‘살아있는 시체’로 명명되었고, 이후 작품에서는 ‘좀비’로 표현된다. ‘전설적인 공포소설’, ‘좀비소설의 모체’ 등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 앞에는 다양한 수식어가 붙여져 왔다.
하지만 소설 내용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잔혹하고 사악한 흡혈귀의 모습이 아니라, 매일 매일을 외롭고 처절하게 살아가는 로버트 네빌의 모습이다.
‘시어스의 선반, 물, 발전기의 점검, 말뚝, 기타 등등’.
아침 식사 전 네빌은 오늘 해야 할 일들을 꼼꼼히 메모한다. 오늘이 며칠이고, 무슨 요일인지 알 길이 없지만,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충만하게 하루를 보낸다. 그래야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고 긴 하루를 빠르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네빌은 홀로 살아남은 영웅도 아니며, 흡혈귀를 죽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변태 킬러도 아니다. 아내와 딸을 잃고 애통해하는 가장이며, 핵전쟁과 변종 바이러스를 무서워하는 소시민이다. 그리고 그런 네빌은 지진을 두려워하는 ‘나’이며, 가족들의 안전을 걱정하며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는 마트 안 사람들이기도 하다.
핵폭탄이 없었다면, 변종 바이러스가 없었다면, 그 전에 전쟁이 없었다면 네빌의 아내와 딸이 죽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지진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철저한 대비와 예방으로 인해 2차 피해와 후유증을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지진으로 인한 원전 사고로 인해, 부산경남 지역이 더 큰 피해를 입는 일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핵으로 인해 ‘지구 최후의 인간’이 된 사람은 로버트 네빌 한 명으로 족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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