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학생과 동문들이 집단 반발할 때까지만 해도 이대 미래라이프 단과대학 설치의 문제는 그저 그런 학내문제에 그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이 대학평의원회가 열리는 대학본관을 점거하고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교수들을 감금했다는 논란을 거쳐 경찰이 투입되자, 구르는 눈덩이처럼 사태의 파장이 점점 커졌다. 급기야 최경희 총장이 미래라이프 단과대학 설치 폐기를 선언하자, 이대 사태는 다각도의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이대 사태를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접근해 보자.
첫째, 소통의 문제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이 장식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심지어 일베에서는 조롱의 대상이 되어 있다). 특히 대학사회에서 학생들은 아이 취급을 받는다. ‘너희는 어려, 중요한 의사결정은 교수 등 어른들이 할게’라는 함의는 이번 이대 사태를 관통하는 정서다. 이대 대학평의원회 전체 11명의 위원 가운데 학생대표는 단 1명에 그쳤고, 평소 의견개진 조차 어려운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학생은 법적으로도 성년이거니와 생물학적 나이를 떠나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대학 내의 문제들 가운데 적어도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라면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이화여대 대학본부는 학생들에게 단지 결정사항을 통보하고 이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였다. 정확한 정보제공과 설득의 과정은 생략되었다.
둘째, 민주주의에 있어서 자본이 미치는 영향의 문제다. 이대 사태의 원인이 되었던 미래라이프 대학 설치는 돈을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이뿐이 아니다. 최경희 총장은 취임 후 상업시설인 ‘이화 파빌리온’건립, 산업연계교육활성화선도대학(PRIME) 도입 등 영리사업에 치중했다. 그러면서도 학점 3.75를 넘긴 학생에게 50만 원씩 주던 장학금을 없애고 24시간 문을 열었던 중앙도서관 운영을 폐지했다. 자본은 이윤의 창출을 핵심적 가치로 삼는다. 따라서 효율성을 중시한다. 문제는 효율성의 원리가 민주주의 원리와 종종 충돌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결국은 사람의 가치를 숭상하는 이념이다. 또한 다원주의와 가치상대주의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효율성의 원리에 비춰보면 이런 것들은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말이 보여주듯 돈 버는데, 사람의 가치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그러나 자본이 추구하는 효율성이 극단화되면 사람은 이윤추구의 대상으로만 의미가 있게 된다. 비정규직 문제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대 대학본부가 학생들과 소통하지 않은 가운데 미래라이프 대학 설치를 밀어붙였던 것도 자본이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앞서 본 소통의 부재라는 것도 이렇게 보면, 최경희 총장 등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거시적으로 자본과 민주주의의 불친화적인 구조적 문제인 것이다.
더 할 얘기가 있지만, 지면 제약 상 한 가지만 더 짚자면, 이른바 외부인 배제의 논리와 투쟁의 성과의 문제다. 사드배치를 둘러싸고 외부인 금지라는 구호가 등장하였지만, 대학본부에 맞서는 이화여대 재학생 및 일부 동문들은 이에 더하여 운동권 금지까지 내걸었다. 내부인이라도 운동권은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는 요구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종국적으로 이런 방식의 싸움이 일정한 ‘승리’로 귀결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사드문제에서 등장한 외부인 금지구호도 실질은 운동권 개입금지였다. 이대생들 및 동문들은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진전 및 자본의 독점, 인간소외 현상에 대하여 가장 강한 문제인식을 가지고 가장 투쟁적인 모습을 보인 운동권이 투쟁의 주체들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그런데도 그 투쟁이 일정한 승리로 귀결되었다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공동체의 방파제가 자본의 위협으로 점차 침식되어 종국에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것 같은 위기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되면 자본은 더욱 괴물화되고 그 속에서 그 어떤 연대의 마음도 같이 사라져버려 진정 자본이원하는 세상, 즉 사람이 이윤추구의 수단으로만 의미있는 세상의 도래가 곧 임박하지 않을까 암담해진다.

이광철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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