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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의 마지막 혁명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 윤욱 사학과 교수
  • 승인 2016.09.05 00:19
  • 호수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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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혁명으로 남은
문화대혁명

농민이 진정한 주인인
중국이 되기를 염원

다시 반복되어선 안되지만
혁명의 정신은 기억해야

 

  올해는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이 일어난지 50주년 되는 해이다. 국내외에서 문혁과 관련된 글들이 종종 발표되고 있다. 최근 사드배치만이 북핵의 위협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란 취지의 글을 쏟아내고 있는 우리나라의 반공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한 신문에서 문혁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은 문혁은 마오쩌뚱의 권력욕에서 시작되었으며 이성이 상실된 광기와 집단폭력의 현장이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사실 이러한 평가는 문혁을 마오쩌뚱이 적과 나를 혼동한 착오에서 비롯되었으며 사회진보도 아니고 혁명도 아닌, 당과 국가, 인민에게 엄중한 재난을 초래한 내란으로 규정하고 있는 중국 공산당의 공식적인 평가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별로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두 집단이 하나의 사건에 대한 비슷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을 보고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문혁에 관해선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문혁의 기원과 과정을 필자의 관점에서 더듬어보면 다음과 같다.

 

문화대혁명 발발 이전의 중국사회

  1949년 공산혁명 이후 농촌에서 농민들은 △지주 △부농 △중농 △빈농 △고농으로 분류되고 지주와 부농은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가구에게 가족 숫자에 따라 1인당 약 60평씩 토지가 배당되었다. 50년대에는 농업의 집단화가 진행되어 토지의 개인 소유가 폐지되고 농민들은 노동에 비례해 수확물을 분배받게 되었다. 이러한 평등주의 경향은 대약진시기에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농민들은 이제 인민공사 안에 설치된 탁아소, 학원, 식당에서 육아, 교육, 식사를 공동으로 해결하고 일반농민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밖에 나와 일하고 노동점수에 따라 생산물을 분배했다. 한편 도시에서는 사영기업이 점차 국영기업에 통합되었고 이전에 양심적인 기업인이었다고 할지라도 연금을 받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평등사회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관료와 당원들이 이전의 지주, 자본가를 대신해 지배계급으로 등장했다. 고급 당 간부들은 휴가철에 베이다허 등지의 전용 휴양시설을 이용하고 최고급 생필품과 특별농장에서 키운 육류와 우유, 야채를 공급받았다. 농민 자녀들은 고등학생 20명 당 1인 꼴로 겨우 대학에 갈 수 있었지만, 혁명열사의 자식들은 특수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쉽게 명문대에 진학했다.
  마오쩌뚱이 보았을 때 49년 이후 중국에서는 반혁명의 움직임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었다. 특히 대약진운동이 실패한 후 이러한 경향은 가속화되었다. 대약진운동을 주도했던 마오쩌뚱이 려산회의에서 비판을 받고 물러난 후, 당권을 장악한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전문성을 갖춘 지식인을 등용하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공장에 상여금제도를 도입하고 농촌에서는 인민공사 제도를 완화하고 개인이 일정량의 텃밭을 일구는 것을 허락했다. 이러한 조치는 지식인들의 지위를 제고하고 도시와 농촌에서 빈부격차를 낳게 했다.
  이러한 현상을 마오쩌뚱은 혁명의 위기로 받아들였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갈 길이 멀게만 느껴지자 그의 생각은 급진적으로 변했다. 그가 항일전과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을 때 보여주었던 △지식인과 농민 △객관적 외부조건과 주관적 의지 △보수와 개혁 사이의 긴장을 잘 조절하던 균형감각을 상실했다. 그리하여 지식인이 농민에게 배울 것을 강요하며 인간의 의지를 맹신하고 전통과 권위를 파괴할 것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선동에 공산혁명의 결실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학생 △노동자 △농민들이 호응하면서 문혁이 일어나게 된다.

   
문화대혁명 당시 사용됐던 포스터

 

 

 

 

 

 

 

 

 

 

1996년 5월 16일 격동하는 중국

  종종 중국인들은 문혁을 ‘10년 동란’이라고 하지만, 10년간 혁명적인 격동과 파괴가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동란적 상황은 사실 초기 2~3년간에 집중되어 있었고 나머지 7년간은 사회가 점차 안정되고 경제가 회복기로 돌아서는 시기였다. ‘10년 동란’이란 말은 10년 전 우리 사회에서 한 때 유행했던 ‘잃어버린 10년’과 마찬가지로 기득권층이 자신들이 권력을 상실한 시기를 마치 사회적인 재앙이었던 양 과장하는 것과 같은 화법이다.
  1965년, 마오쩌뚱은 혁명을 회생시키고 보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의식 자체를 프롤레타리아 방식으로 바꾸는 사상정화가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당 지도부에 문화혁명을 제안했지만, 대약진운동 후 정치·사회운동보다 경제발전에 매진하려는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 권력을 장악한 당권파들은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에 마오쩌뚱은 몇 해 전에 발표된 자신을 풍자한 우한의 「해서파관」(충직한 신하 해서가 파직을 당함)이란 신편 역사극을 새삼스레 들추어내어 이것은 부르주아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반격이라고 몰아붙였다. 당시 북경시장이었던 펑전을 비롯한 당권파가 이는 지나친 해석이라고 오함을 두둔하자 마오쩌뚱은 1966년 5.16 통지를 내려 자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는 당권파에 대해 정치투쟁을 벌일 것을 호소했다. 이에 새로운 특권계층이 된 당간부의 자식들이 대학 진학과 졸업 후 좋은 일자리를 독차지하고 있던 것을 본 고등학교, 대학교의 학생들이 열렬히 호응하고 이미 린비야오의 지도 하에 마오쩌뚱에 대한 신앙이 확산되어 있던 군대가 학생들을 지지함으로써 문혁은 서막이 올랐다. 학생들은 홍위병을 조직했는데 당권파의 자녀, 국민당 시절 자본가, 지식인이었던 아버지를 둔 자녀 등 다양한 학생들이 홍위병에 가담했으므로 홍위병 내부에서의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도 치열했다. 심지어 무기고에서 탱크, 박격포를 끌고 나와 시가전을 벌이는 일도 있었다.
  사회혼란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게 된 마오쩌뚱은 곧 △당 △노동자 △군대가 참여하는 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특히 군대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고 학생들에게는 학교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이에 혁명이 배신당했다고 느낀 급진적인 학생, 노동자들이 군대와 충돌하여 67년 3월 흑풍사건, 7월 우한사건이 발생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학생, 노동자들이 군대에 의해 학살되었다. 내전을 우려한 마오쩌뚱은 주은래에게 당과 정부조직을 재건하도록 하고 초기 문혁을 주도했던 극좌주의 운동가들을 숙청했다. 하지만 군대와 급진주의자들의 충돌과 학살은 68년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문혁 기간 중에 학살 또는 처형당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사실 당권파가 아니라 마오쩌뚱 자신이 선동했던 급진적인 노동자와 홍위병이었다.
  하지만 이로써 마오쩌뚱의 마지막 혁명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마오쩌뚱은 문혁이 계속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사망하기 3달 전 정치국회의에 참가한 마오쩌뚱은 자기의 인생을 회상하면서 문혁이 미완의 혁명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일 이 혁명이 실패하면 엄청난 피바람이 몰려올 것이라고 했다. 마오쩌뚱은 당과 정부를 중심으로 사회질서를 재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속도는 더디어졌지만 노동자, 농민이 진정한 주인인 사회로 중국사회가 나아가길 염원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이 멈추지 않는 한 혁명은 계속되는 것이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에 의한 공산당 고위인사들의 고문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반복되어선 안 되지만 그 정신을 잊진 말아야

  문혁 발생 50돌을 맞이한 다음날인 지난 5월 17일, 중국정부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환구시보는 문혁은 이미 1980년 발표한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문에서 마오쩌뚱의 과오가 빚은 대재앙으로 하등의 혁명적 의의조차도 부정하는 것으로 이미 결론이 난 사건이므로 다시 이것을 재평가할 여지가 없고 문혁과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나서도 안 된다는 입장의 사설을 발표했다. 역사에 영원한 해석은 없다. 시간이 흐르면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석은 항상 변한다는 것은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상식이다. 지금은 문혁뿐만 아니라 1980년 발표한 결의문 자체가 역사적 사건으로서 평가를 받아야할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정부가 36년 전에 있었던 결의문에서 제시했던 입장을 견지하고 결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중국정부가 문혁을 학문적인 입장에서 바라보지도 않고 문혁을 현재적 입장에서 반추하고 그 가운데 교훈을 얻으려는 자세가 부재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현재 중국도 우리 사회만큼이나 금수저와 흙수저의 삶이 천양지차이다. 수천만 명에 이르는 농민공 자녀들은 부모가 도시로 돈 벌러 가면서 농촌에 방치되어 무관심 속에 살고 있는 반면, 돈 있는 부모들은 자식 교육을 위해 홍콩 근처로 이사해 아침마다 홍콩에 있는 유치원, 학교로 등교시킨다. 고급 당간부 자식들이 미국이나 유럽의 명문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청렴한 정치인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한 전직 총리의 아들은 중국 제일의 갑부 중 한 사람이다. 마오쩌뚱이 가장 우려했던 모습으로 현재의 중국사회가 변모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문혁시기에 겪었던 문화유산의 파괴와 개인적 고통과 고귀한 인명의 손실이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하지만 중국이 문혁의 정신만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윤욱 사학과 교수

 

윤욱 사학과 교수  press@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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