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케 살아남았다. 올여름 폭염에도 전기료 누진세 폭탄을 맞지 않고 살아남았다. 에어컨을 켜지 않고도 살아남는 비책이 따로 있을 리 없다. 그냥 전기료 걱정 없이 에어컨을 펑펑 틀어 놓은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관에 자주 갔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은 당연히 많았고, 덕분에 올여름 극장가는 최대 호황을 누렸다(올여름 극장매출증가율은 134%에 이른다. 작년은 88%였다). 객석 첫 줄은 공짜로 줘도 앉으면 안 되는 좌석이라는 것도 난생처음 알았다. 집을 탈출하여 극장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본 영화는 재난영화였다. 폭염에 재난영화라… 의아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사실 올해의 더위 수준은 재난이라 할 만했다.
  폭염도 재난이라면 누굴 탓할 일이 아니다. 재난의 사전적 의미대로라면,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 인한 뜻하지 않은 불행한 변고’에 악당이 있을 리 없다. 그런데 올여름의 폭염과 2016년 한국의 재난영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에는 욕먹어 마땅한 자들이 있다는 점이다. 우선 폭염을 보자면, 올여름 전 지구적인 더위에 한국인들이 유난히 고통받은 것에 대한 꽤 큰 책임은 한국전력공사에 있다. 최대 11.7배에 달하는, 악랄한 사채업자 뺨치는 셈법으로 더위 먹은 국민들을 더욱 열 받게 한 한전의 누진제가 이상고온현상이라는 자연재해를 인재로 바꿔놓았다.
  올여름 재난영화의 재난 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상 바이러스의 창궐로 전 국민이 좀비가 될 위기에 처한다는 <부산행>의 이야기에도, 무너진 터널 속에 갇혀 홀로 악전고투하는 한 사내를 다룬 <터널>의 이야기에도, 그 재난에 책임을 지거나 비난받아 마땅한 자들이 등장한다. 전 국민적인 재난이든, 단 한명이 처한 재난이든 이 영화들은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겪은 비극적인 사건들의 일단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지극히 ‘한국적’이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고 이 재난영화들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한국형 재난영화로서 <부산행>과 <터널>에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재난이 어디서 비롯되었든지 간에 재난을 맞은 인물들이 살아남는 길은 오직 ‘스스로 구하라’일 뿐이라는 점. 이 대목은 올여름 ‘비평교실’에서 어느 수강생이 지적한 재치 있는 코멘트에 전적으로 빚지고 있다. 그는 “이 영화들의 홍보 카피는 재난 상황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의 그것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고 했다. 과연 그렇다.
  <터널>의 포스터에는 시멘트 가루를 뒤집어쓴 하정우의 얼굴 위에 “나 아직 살아있는데…”라는 카피가 자리하고 있다. <부산행>의 카피는 “끝까지 살아 남아라”다. ‘그는 아직 살아있지만’ 사회는 그의 구조작업을 중단했고, 시스템 부재 사회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건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자력갱생(自力更生), 각자도생(各自圖生). 한국에서 재난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이렇게 요약된다.
  반면 화성에 홀로 남겨진 우주인의 무사생존귀환기인 <마션>(2015)에는 “반드시 그를 구하라(Bring Him Home)”라는 카피가 붙어있다. 포스터 이미지는 <터널>과 마찬가지로 재난을 맞은 맷 데이먼의 얼굴이지만 이 카피의 목소리는 ‘그를 반드시 지구로 데려오려는’ 시스템의 것이다. 또한 <터널>과는 달리, 우주에 낙오된 단 한명을 지구로 귀환시키기 위해 드는 몇 년의 시간과 천문학적인 예산은 이 영화에서 문제 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구멸망을 앞둔 SF 재난극 <인터스텔라>(2014)의 카피도 기억하고 있다.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게 과연 세계관의 차이일까? 그들의 낙관과 우리의 비관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 하나가 놓여있다. 말하자면 그 사회 시스템에 대한 그들의 신뢰가 우리에겐 없다는 것. 이 절망적이고도 자명한 사실 앞에서, 폭염조차 인재로 바꾸고야 마는 우리 사회의 무능하고 무방비한 맨얼굴을 한국 재난영화에서 다시 마주하는 일은 더 이상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강소원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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