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터키의 길고양이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곳의 고양이는 고양이답다. 마음먹은 대로 누워 편히 쉬고 걸어 다니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먼저 다가가 안긴다. 우리네 길고양이들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이 땅의 가여운 친구들은 단지 그 어떤 악의가 실리지 않은 발걸음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도망부터 치고 본다. 후미진 골목 자동차 밑바닥에 웅크려 언제 어디서든 바로 피신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어째서 같은 유전자를 가진 고양이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나는 정답의 자명함을 뒤늦게 인식했다. 이들이 눕는 아스팔트가 정반대의 정서를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스팔트는 석유의 찌꺼기이다. 주로 길바닥을 포장하는데 쓰인다고 고등학교 기술 시간에 배웠다.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필자는 더 이상의 전문적인 내용은 알지 못한다. 다만 포장된 도로가 갖는 객관적인 기능이 아닌, 사회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뿐이다. 이 땅에 흘겨진 시선을 포착하고 그려내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글은 추상화 일지도 모르겠다.
  아스팔트를 덧칠한 우리 사회의 시선은 무엇이었을까? 이 사회의 구성원인 나 자신부터 돌이켜 본다. 멸시 풍토가 빚어낸 위축된 반경을 원래 그런 것인 양 당연하게 여긴 건 아닌지. 나와 너의 단 한 번은 수백 번의 폭력으로 불어 날 수 있다는 걸 간과해온 건 아니었는지. 두려움을 장난으로, 정당함을 과민함으로 치부해버린 건 아닌지. 외려 화가 가득 찬 변명부터 해오지는 않았는지. 인과를 뒤집어 책임을 전가한 건 아니었는지를 말이다. 아스팔트의 두께에는 나의 편협함과 고양이의 두려움이 퇴적되어 있었다. 이렇게 보면 나 역시 아스팔트를 쌓아 올린 주주(株主) 중에 한 명임이 틀림없다.
  어느 영화 속 소녀의 대사처럼 무엇이 중한 것인지,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생각해본다. 대를 이어 걷어 차여왔던 고양이들이 본능적으로 체득했을 공포감의 누적치를 먼저 이해하고 반성하는 것. 무엇이 고양이로 하여금 사람의 발소리에 발길질부터 떠올리도록 학습시켰는지부터 파악하는 것. 그래서 강자의 불쾌함과 약자의 공포감 사이의 제대로 된 경중을 아는 것. 그냥 걷는 누군가와 누워 쉬는 어떤 존재 사이에 어울리는 감정은 불쾌한 공포가 아닌, 문제없는 평온함이어야 한다는 것. 아스팔트 위에 깔릴 서사는 공포와 혐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인지하지도 못하고 내는 평범한 발소리조차 누군가에겐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일 수 있다. 악의 없는 평범함이 어쩌면 얼굴 없는 혐오 일지 모른다. 도망치는 고양이를 탓하기 전에 바로 이 길에 깔렸었던 수많은 발길질과 발자국부터 지워내야 한다. 이 글은 고양이 이야기이기도 하고 사람 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글은 못난 사람에 의해 벽에 던져져 세상을 떠난 새끼 고양이를 위한 애도이기도 하고, 못난 나의 뒷발질에 알게 모르게 몇 번이고 채였을 웅크린 소수자들을 향한 나의 진중한 사과문이자 반성문이기도 하다. 강남역과 고양이의 사잇길에서, 얼마간의 고민을 글로 적어 보낸다. 선(善)의 평범성을 위해서.

나호선(정치외교학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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