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 영화 속 한 장면이다. 어느 로스쿨 면접 중의 일이기도 하다. 그렇잖아도 ‘현대판 음서제’라는 의구심 때문에 난처했던 로스쿨이 스스로 논란을 자초하고 말았다. 이쯤 되면 그 어떤 해명도 ‘구차한 변명’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로스쿨 입장에서는 분명 오해도 있고, 억울한 점도 많을 거다. 그마저도 담담히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에 처음부터 완벽한 것은 없을 터, 로스쿨도 마찬가지다. 고치고 다듬는 게 중요하다. 오해는 풀고, 허점은 메우면 된다.
  이참에 ‘깜깜이 전형’이라는 꼬리표만큼은 확실히 떼야 한다. 사법시험제도는 단연 이 대목에서 돋보인다. 누구나 그 결과를 곧이 받아들인다. 아무개 판사의 아들이 사법시험에 합격하기라도 하면 다들 축하하고 부러워했다. 지금 로스쿨은 어떤가. 어느 판사의 딸이 로스쿨에 합격하기라도 하면, 도끼눈을 하고 쳐다본다. 세태가 지금 이러할 진데, 언제까지나 깜깜이 전형을 지속할 수는 없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고쳐야 한다. 국민의 눈에서 멀어지는 순간, 로스쿨도 법조계도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렇다고 아예 ‘판’을 갈고 싶지는 않다. 사법시험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사법시험을 통해 ‘인생역전’을 꿈꾼다. 그래서일까. 사법시험이 폐지되면 개천에서 ‘용(龍)’ 나기는 틀렸다며 섭섭해 한다.
  실제로 그랬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합격해도 그 정도였을까 싶을 정도다. 고시 합격과 동시에 가히 드라마틱한 변화가 뒤따른다. 젊디젊은 청년은 당장 ‘영감님’으로 불린다. 이 정도는 약과다. 권력과 부, 그리고 명예 앞에 한없이 당당해진다.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인생 끝날 때까지 진짜 ‘영감’인 양 살아가게 된다. 이런 ‘마술’ 같은 경험하고 나면 그 짜릿함을 잊을 수 없기 마련이다. ‘고시’는 서민들의 희망이요, ‘꿈’이었다.
  가난했던 후진국 시절 고시제도는 나름대로 유용한 발전 전략이었다. 혈연사회에서 벗어나 ‘법치사회’를 앞당겼다. 젊은 법조 인재들에게 힘과 명예를 몰아주었으니, 그럴 수밖에. ‘법’이란 게 무서운 줄 아는 나라가 될 수 있었다. 행정 분야도 마찬가지다. 고시를 통해 많은 젊은 인재들을 국가 발전 전략의 마련에 동원할 수 있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고시제도가 기여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고시 제도는 단언컨대 ‘유효기간’이 지났다.
  첫째, 지금은 법조인이 더 이상 ‘용’일 수는 없다. 모든 국민이 주권자인 시대다. ‘용’이 있으면 ‘이무기’도 있고, ‘뱀’도 있을 터, 평범한 서민들은 ‘뱀’으로 두고, 극소수의 법조인만 ‘용’이 되는 컨셉 자체가 현대 민주주의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다. 더군다나 부와 권력과 명예를 독점하고, 그래서 서민들 앞에 군림하는 ‘용’이라면, 이건 없어져도 한참 전에 없어져야 했다.
  둘째, 전도유망한 청년을 곧바로 ‘영감’으로 만드는 건 낭비다. 사회적으로 큰 낭비다. 유능한 청년일수록 언제까지나 ‘젊은 청년’으로 남도록 해야 한다. 나라를 위해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도록 격려하고, 독려해야 한다. 그 덕분에 평범한 많은 서민들이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세상이어야 한다. 아마도 ‘용’ 대접은 우리 사회가 느지막이 ‘60대 청년’에게 할 것이다. ‘사회적 존경’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최근 검사장 출신 변호사의 추락이 화제다. 순식간에 ‘용’이 되었던, ‘마술’ 같은 경험을 공유한 이들 사이에서, 전관예우나 기수문화는 하등 문제 될 게 없어 보였을 것이 틀림없다. 기수와 이름을 팔아 수십억씩 벌어들이는 것도, ‘용’으로서는 ‘당당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들만의 카르텔이 초래한 치명적 부작용인 셈이다.
  스마트폰 시대다. 법조계는 아직도 전화교환원이 딸린 유선전화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따져 볼 일이다. 로스쿨 학생들에게, 밤잠 잘 때조차도 ‘용꿈’ 꾸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지금은 평생을 ‘청년’으로 살아갈 법조인이 필요하다.

권혁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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