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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미적분을 발견했다고?
  • 함규진 서울교육대 윤리교육과 교수
  • 승인 2016.06.06 00:09
  • 호수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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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공은 아니지만 수학사와 과학사에 관심이 많은 친구가 있다. 얼마 전 그 친구를 만났는데, 대뜸 이렇게 물어온다. “다산 정약용이 미적분을 발견했다는 거 알아?” 나도 수학사를 전공하지는 않았으나, 나름 정약용으로 학위논문을 쓴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황했다. 논문 쓰는 과정에서 <여유당전서>를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그런 내용은 없었던 것이다. 그 친구는 스마트폰으로 <나무위키>의 미적분 관련 페이지를 보여주었다. 뉴턴과 라이프니츠와는 전혀 별개로, 정약용이 미적분을 발견했다고 똑똑히 적혀 있었다.
  왠지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으로, 집에 와서 자료를 뒤져보았다. 아무래도 정약용이 미적분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그의 저서는 물론 한국 수학사 책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위키피디아 한국어판>를 찾아보았다. <나무 위키>의 내용의 토대가 된 것으로 보이는, 제법 자세한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조선의 미적분학 기초가 다져진 것은 정약용의 논문이다. 정약용은 부피와 넓이는 무한히 작은 부피와 넓이의 합으로 구해야 한다고 했다. 이 방법은 아르키메데스의 아이디어와 비슷했지만 이 결과는 20세기 초반까지 거의 평가되지 못했다. 그가 만든 무한소의 개념은 잘못된 결과를 이끌어 낼 수도 있었기 때문에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정약용의 무한소에서의 미적분과 유한 차에서의 미적분에 대한 정식 연구는 유럽에서 거의 같은 시대에 시작됐다. 페르마는 무한소 오차항이 있어도 등호가 성립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에뒤퀄리티 개념을 소개했다…’.
  사실이라면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도무지 이상했다. 정약용과 ‘거의 같은 시대’ 사람으로 나오는 페르마는 17세기 사람이며,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미적분을 발견한 때도 17세기 말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1762년에 나서 1836년에 죽은 사람인 것이다. ‘혹시?’ 뭔가 짚이는 데가 있어서 이번에는 <위키피디아 영어판>를 찾아보았다. 미적분 페이지를 보니 이렇게 나와 있었다. ‘유럽의 미적분학 기초가 다져진 것은 보나벤투라 카발레리의 논문이다. 카발레리는 부피와 넓이는 무한히 작은 부피와 넓이의 합으로 구해야 한다고 했다. 이 방법은 아르키메데스의 아이디어와 비슷했지만 이 결과는 20세기 초반까지 거의 평가되지 못했다…’. 맙소사!
  결국 <위키피디아 영어판>의 내용을 번역하면서 <위키피디아 한국어판>의 편집자가 장난을 쳤고, 그 내용이 <나무 위키>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위키피디아 한국어판>와 <나무 위키>는 대학생을 비롯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척 많이 참조하는 지식창고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터무니없는 날조가 과연 하나뿐일까? 이런 날조된 지식을 참 지식이라고 믿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에서 망신당하는 일은 없을까?
  착오 또는 의도적 날조로 신화가 만들어지는 사례는 역사 속에서 적지 않다. 오늘날 예루살렘에 서 있는 알 아크사 모스크와 ‘바위의 도움’은 그와 관련된 무함마드의 고사를 기념하기 위해 이슬람 칼리프가 창건한 것이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 때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은 이슬람적인 것이라면 사람이고 물건이고 무자비하게 없애 버렸지만 이 건물들은 놔두었는데, 그것이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경우로, 로마의 카피톨리노 광장에 있는 청동기 마상은 로마 시대의 것으로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의 기마상이라고 여겨졌기에 파괴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기독교를 몹시 박해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 상이었다. 그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교황에게 토지를 기진하여 교황령을 이루도록 했다는 이야기는 중세 내내 의심받지 않았지만, 1440년에 로렌조 발라의 조사 결과 터무니없는 허위임이 드러났다.
  또한 일제는 ‘육탄 3용사’라는 전설을 만들어냈다. 1932년 중국군에게 폭탄을 안고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했다는 세 병사의 이야기는 새빨간 거짓말로 뒤에 판명되었다. 여기서 힌트를 얻은 듯한, 한국전쟁 중 적 진지에 돌격했다는 국군 ‘육탄 10용사’는 국립묘지에 동상으로 서기도 했지만, 역시 허위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은 먼 옛날이라서, 증거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가능했다. 지금은 ‘모든 정보를 손끝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화 시대가 아닌가? 그만큼 잘못된 정보가 미칠 수 있는 악영향도 큰 마당에, 이처럼 뻔뻔한 날조가 이처럼 쉽게 행해질 수 있음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함규진 역사 저술가

 

함규진 서울교육대 윤리교육과 교수  danbi@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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