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다니다 보면 캠퍼스를 누비는 많은 고양이를 볼 수 있다. 이 고양이들에게 매일같이 밥을 주는 이가 있다기에 그를 만나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인터뷰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이들도 있고, 고양이가 살해당하기도 했던 경험 때문에 고양이의 서식지가 알려지는 것이 불안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후 이 일은 기사화되지는 않았지만, 캠퍼스를 누비는 많은 고양이는 여전히 의문의 대상이었다. 학교에 이렇게 많은 고양이가 사는 것이 단순히 학교가 친환경적(?)이거나 고양이의 번식력이 뛰어나기 때문만은 아닐 게다.
캠퍼스 밖의 원룸촌에도 유기동물들이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하기는 매한가지다. 우리나라의 애완동물을 기르는 인구는 어느덧 1,000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러한 동물들의 운명은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에 따라 학대받거나 사랑받는지 운명이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사랑마저도 인간 중심일 때가 많다. 필자는 고양이를 키우면서 ‘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동물과 사랑받지 못하는 동물로 나뉘는지’에 대해 질문받은 적이 있다. 아름다운 외모와 사람에게 더 친근하기 때문이라는 답변으로는 부족했다. 사랑하는 고양이를 위해 닭, 오리, 연어 등을 가공한 사료를 구매하면서 다른 동물들에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필자도 간헐적으로라도 채식을 시도하고 있던 터라 이 질문은 더 혼란스럽게 다가왔다. 우리의 사랑은 이다지도 모순적일 때가 많다.
이러한 의문 끝에 <동물들의 소송>이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안토니 괴첼은 동물 소송 변호사로 ‘동물도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고 인간과 평등한 관계를 맺을 권리가 있다’는 ‘동물권’을 대변한다. 많은 철학자는 동물과의 관계가 사람 간의 관계로 이어진다는 것을 경고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동물을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다루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임무를 다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는 감정을 둔화시키고 도덕심을 약화시키며 서서히 타락하도록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지적은 역사적으로 맥락이 닿아있다. <동물 홀로코스트>의 저자 찰스 패터슨은 인간이 동물을 가축화하고, 사유화하는 방식으로 다른 인간을 사유화하려 노예 제도를 만들고, 학대한 기록들을 고발한다.
인간성과 인간의 존엄성을 인식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듯이 동물권을 존중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고, 이를 위한 우리의 노력도 중요하다.
애완동물을 기른다는 천만 인구에 비해, 우리의 동물권에 대한 인식은 부족한 것 같다. 지난 선거에 녹색당만이 동물권을 공약으로 전면에 내세웠다. 한국 사회의 산적해있는 사회적 과제들 중 동물권에 대한 인식과 과제는 여전히 개인의 단위로만 머물러 있는 것이다.
저자들은 무턱대고 동물을 사랑하라거나 채식을 하라고 강권하지는 않는다. 동물 사랑은 감성적이거나 착한 사람들만 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동물의 권리가 사회적 약자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동물과 인간과의 관계 재정립을 통해서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도 되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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