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마감일, 시계가 새벽 3시를 가리키자 퇴근 욕구가 고개를 든다. 남은 기사는 아침 일찍 쓰겠다는 부질없는 다짐을 한다. 문창회관을 나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올라탄다. 주택가 골목길을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아 근처 아파트 이름을 부른다. 택시 뒷좌석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는다. 다왔다는 말을 듣고 눈을 떠 택시에서 내린다. 어두운 골목을 따라 집까지 걸어간다. 필자에게 세상은, 이렇게 다녀도 별로 위험하지 않다.
  그렇다고 세상이 정말 안전한가. 강남역에 이어 부산의 길거리에서 우리 사회의 민낯이 드러났다. 일부 언론은 이를 ‘묻지마 범죄’라고 말하지만 이는 올바르지 못한 표현이다. 범죄의 목표는 불특정 다수가 아니었다. 그날 그 화장실에 들어갔던 남자들은 멀쩡히 걸어 나왔고, 그날 그 거리에 있던 남자들은 가로수 지지대나 널빤지로 구타당하지 않았다. 물론 이 사건들을 여성에 대한 혐오범죄(Hate Crime)라고만 단정 짓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자들이 나를 무시했다’라는 말은, 그가 정신질환자였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사회적 함의를 가진다. 군사정권 시기 ‘정보기관이 나를 감시한다’는 망상에 시대상이 담겨있던 것처럼, ‘감히 여자가 나를 무시해’ 속에는 여성혐오가 자리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과연 그처럼 여성혐오가 만연한가에 의문을 품기도 한다. 이는 일정 부분 여성혐오라는 표현에서 기인한 오해이기도 하다. 여성혐오의 원어인 ‘Misogyny’는 사전적 의미의 ‘혐오’ 외에 여성에 대한 차별, 멸시 대상화, 도구화 등을 모두 아우른다. 과거에는 Sexism(성차별)보다 좁은 의미로써 증오의 뉘앙스가 강한 단어였지만, 이제는 의미의 폭이 넓어졌다. 문제는 과거 기준으로 번역된 혐오라는 표현이 여전히 ‘극도로 싫어함’으로만 받아들여진다는 것에 있다. 시간이 흐르며 의미가 넓어진 Misogyny와 달리 우리말의 혐오는 의미가 확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혐오라는 표현 대신 원어를 살린 ‘미소지니’라고 하거나 ‘여성멸시’ 정도로 변역하자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성혐오냐 미소지니냐 따위가 아니다.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문제라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단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진 ‘나 일수도 있다’라는 공감대는 성별에 따라 안전도가 달라지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가지 말라고 날을 세운다. 하지만 남성들이 얻을 최악의 결과가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는 불쾌함’이라면 여성들이 경험할 최악의 결과는 이를 초월한다. 더욱이 남성들 스스로도 위험한 것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으며, 여성들의 일상적 피해까지 생각하면 잠재적이라는 말이 우스울 정도다. 당신도 주변의 여성들에게 위험하니까 밤늦게 다니지 말라거나 남자들을 조심하라고 말해본 경험이 있지 않는가.
  필자는 오늘도 새벽에 귀가할 것이다. 택시에서 졸거나 어두운 골목을 혼자 걸어가도 별로 불안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칼을 들고 달려들 가능성이 0%는 아니지만, 진지하게 두려워할 수준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특정 대상에 대한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차별의 대상은 폭력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공격은 보통 자신보다 낮은 위치로 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화장실 공간분리보다는 일상에 만연한 여성혐오를 걷어내는 것부터 선행돼야 하지 않을까. 

김민관 대학부장
left0412@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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