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는 ‘수저론’ 혹은 ‘수저계급론’이 활개를 치고 있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가 그것이다. 이러한 수저론은 개인의 노력보다는 부모의 재산에 따라 인간의 계급이 나뉜다는 자조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심지어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에 대한 기준이 정량적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금수저는 자산이 20억 이상이거나 가구 연 수입이 2억 이상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수저론의 논리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중의 하나로 분류하기 어려운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계 설정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양한 수저들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금수저 위로는 다이아몬드 수저, 플라티늄 수저 등이 있고, 은수저 아래로는 동수저, 놋수저, 플라스틱 수저 등이 있다는 얘기도 등장했다. 이런 식으로 수저를 계속해서 세분하다 보면, 결국은 수저 계급이 불연속적으로 분할되지 않고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불변의 수저 계급을 명확히 상정하는 것은 너무 자의적이지 않은가?
수저론은 소위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렵다”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사실상 어느 사회나 산업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나면, 경제 성장이 완만해지고 계층 간 이동이 어려워지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어렵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맬컴 글래드웰은 <아웃라이어>에서 유대인 이민자들이 미국 사회에 제대로 정착하는 데 3대가 걸렸다는 통계적 법칙을 들고 있다. 내가 수저론에 함몰되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러한 상황은 나의 후손에게도 그대로 전해진다. 이와 달리 내가 열심히 노력한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의 후손은 나아지지 않겠는가?
수저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것이 일종의 결정론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결정론은 위험한 법이다. 세상에 수많은 변수가 있고 그러한 변수들 사이의 상호작용도 존재하건만, 어찌 하나의 변수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조금 오래되었지만 <가타카>라는 영화는 결정론이 가진 함정을 잘 보여주면서 매우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다.
제롬은 완벽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쉽게 얻을 수 있었지만, 그러한 삶에 공허함을 느끼고 도로에서 자살을 기도한다. 자살이 실패하고 다리가 마비되어 장애인의 삶을 살게 된 제롬은 열성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빈센트에게 자신의 유전정보를 빌려준다. 제롬은 빈센트의 집에서 은둔 생활을 하면서 빈센트가 유전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그동안 자신이 결여하고 있었던 것을 발견한다. 제롬은 빈센트에게 “나는 너에게 몸을 빌려줬지만 너는 나에게 꿈을 빌려줬다”고 말한다. 완벽한 유전자를 지닌 제롬에게는 없었지만 불완전한 유전자를 가진 빈센트에게 있었던 것은 바로 역경을 뛰어 넘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근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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