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피해와 관련되어 ‘징벌적 손해배상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환경부 장관은 5월 11일, ‘우리나라는 유럽 대륙법을 따르기 때문에 영미법의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는 우리와 맞지 않는다’고 하며 반대했다. 그러나 이미 대통령도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이하 하도급법)과 관련하여 ‘10배까지 징벌적 손해 배상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고, 현행법에서도 3배 이하로 징벌적 배상을 할 수 있는 하도급법이 이미 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엉뚱한 소리를 했고 국회에서도 부당한 법을 제정한 것일까? 집단소송에 대해서도 환경부 장관은 반대했는데 역시 그 이유가 우리는 대륙법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인지 모른다.
그 전날 5월 10일 서울시가 국내 최초로 '노동이사제' 도입을 선언하자 노동부 장관은 우리나라에 맞지 않는 제도라고 하면서 반대했다. 그러나 노동이사제는 대륙법 국가인 독일을 비롯한 유럽연합 대부분의 나라에서 보편화됐으며 미국에서도 일부 도입됐다.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광범위하게 그 제도를 도입한 독일은 기업 규모에 따라 최고 의사결정기구의 절반까지 노동자 대표로 채우도록 법으로 정했다. 그러니 적어도 선진국의 경우 대부분의 나라에서 채택하는데도 우리나라와는 맞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하는 주장인가? 특히 우리나라는 독일을 모범으로 삼는 대륙법 국가가 아닌가?
이처럼 시민들의 절박한 현실적 요구에 대해 보수적인 장관들이 반대하면서 내거는 대륙법이니 영미법이니 하는 구별은 선진국의 예를 아전인수격으로 이용하여 반노동 친기업 정책을 수호하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것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 법체계가 그런 두 가지로 발전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에 와서 그 구별은 상당히 약화되고 대륙법과 영미법의 혼화라고 하는 현상마저 생기고 있다. 가령 로스쿨이나 국민참여재판과 같은 것은 영미법의 제도이지만 대륙법 국가인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채택했다. 뿐만 아니라 1945년 해방 이후부터 헌법을 비롯한 여러 법역에서 대륙법과 영미법의 교차 영향은 나타났다. 따라서 우리 현실에 필요하면 어느 쪽 법이라도 채택할 수 있는 것이지 영미법 것이니 안 되고 대륙법 것이니 된다는 식의 고정관념은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 보편의 옳은 법이냐 아니냐는 구별이 더 중요하다.
가령 국가보안법 같은 법은 지금 영미법은 물론 대륙법에서도 인정되지 않는다. 적어도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법이다.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제한하여 노조 조직률이 10%도 안 되게 하는 우리 노동법도 마찬가지다. 특히 쟁의를 업무방해죄로 처벌하는 것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야만이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사형제도를 인정하지 않거나 양심적 병역의무를 인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진실임에도 명예훼손 책임을 지우는 형법도 다른 나라에 유례가 없다. 결국, 법에 대한 판단은 ‘좋은 법’과 ‘나쁜 법’이 있을 뿐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에는 ‘나쁜 법’이 너무 많다. 그리고 그런 법을 고집하는 ‘나쁜 정부’, ‘나쁜 정치인’들이 너무 많다.
그 정점은 대통령이다. 여러 사례가 있지만, 최근에는 총선 패배 후 느닷없이 구조조정을 내걸며 외친 스웨덴식으로 하자는 주장이다. 복지를 삭감해 성장과 재정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모범이니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스웨덴은 이른바 고부담 고복지의 전형으로서 사회복지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닌 우리나라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특히 스웨덴은 우리의 노동법이나 사회보장법과 근본적으로 달라 노동조합 조직률이 80%에 이르고 복지는 그것을 토대로 한다. 게다가 사민당을 비롯한 진보정당 집권의 역사가 거의 1세기에 이르는 스웨덴과 한국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느닷없이 튀어나온 스웨덴 이야기는 금방 사라졌다. 앞으로 또 무슨 터무니없는 외국 이야기가 나올까? 민주주의 고향 영국이나 통일 독일을 따라 내각제 개헌을 해야만 민주주의도 통일 대박도 가능해진다는 주장이 아닐까? 참 편리한 사대주의다.

박홍규
영남대 교양학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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