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발발한 6·25 전쟁 당시 약 1,000여 일 동안 부산은 임시수도의 기능을 수행했다. 그런데 최근 ‘임시수도’라는 명칭이 아닌 ‘피란수도’로 부산을 칭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철호(국제전문대학원) 교수는 “피란수도는 당시 국가 수도의 기능이 온전히 내려와 그 역할을 다했던 부산의 역사성을 담고 있는 단어”라고 설명했다. 임시수도라는 표현은 부산이 수도의 임시적 기능을 넘어 ‘피란’이라는 상황 속에서 생긴 △생활 △문화 △정치 등의 모습을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의 모습을 담고 있는 유적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피란수도 부산의 모습을 <부대신문>이 조명해봤다.

전쟁의 포성 속, 피란민 품은 1,023일

부산이 피란수도가 된 것은 1950년 8월 18일이다. 한국전쟁의 발발 후 전선이 급속히 남하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수도를 옮겨야 했고, 정부의 각 부처 등 주요 기관들이 모두 부산으로 이전하게 됐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서울이 수복되면서 1차 피란수도의 70일이 끝난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부산은 다시 피란수도의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1, 2차를 합하여 약 1,023일. 이 기간 동안 부산은 한국 정치와 행정, 그리고 피란민들의 생존 현장이 됐다.
지금의 동아대학교가 위치한 대청로는 국가핵심기관이 모여 있었던 장소다. 현재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과 임시수도기념관은 각각 임시수도 정부청사와 대통령 집무실이었다. 이를 중심으로 △교육 △상업 △예술 지구 등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또한 거대한 피란지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전쟁 발발 전 부산은 약 30만 명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그런데 피란민들이 유입되면서 한국전쟁이던 때에는 약 100만 명의 인구가 부산에서 생활하게 된다. 갑자스런 도시의 인구급증으로 부산은 무계획적인 비대화가 이뤄지기도 했다. 우리 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차철욱 교수는 “오늘 날의 산복도로 등은 살 곳이 없던 그 시절, 산으로 주택지가 확장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부산발전연구원 오재환 연구위원은 “당시 우암동 소막사를 피란민들이 잘라서 생활 근거지로 썼다”며 “그중 일부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고 전했다.

피란수도 의미를 다시 되새기다

약 3년의 시간 동안 수도의 역할을 톡톡히 한 피란수도 부산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전문가들은 포용과 애환의 삶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유례없는 도시면서 현재 대한민국을 있게 한 역사적 장소라는 점을 꼽았다. 김기수(동아대 건축학) 교수는 “당시 부산 시민들은 피란민들을 포용하며 같이 살고 견뎠다”며 “그 역사가 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의 발전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 부산엔 당시 역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강동진(경성대 도시공학) 교수는 “1980~2000년대, 개발 중심의 기간을 거치면서 부산은 피란수도의 유산들에 관심을 크게 두지 못했다”고 전했다. 또한 차철욱 교수는 “오늘날의 부산이 만들어진 데에는 피란민들의 공로도 큰데, 이들에 관련된 자료는 하나도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전문가들은 지금부터라도 유산들을 연구하여 기록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를 위해 세계문화유산의 등재를 중장기적 목표로 삼고, 연구를 진행 중이다. 강동진 교수는 “세계문화유산은 목적이 아니라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며 “지향점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부산이 가진 ‘역사적인 근대성’을 부각시키고 대한민국을 지킨 수호도시로서의 정신적 가치를 재정립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 과정에는 부산 시민들의 참여와 공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오재환 연구위원은 “학술적 연구, 유산 등재만을 위한 사업이 아닌, 시민들이 같이 공감하는 작업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며 “이를 통해 시민들과 같이 피란수도 부산의 독특한 상징 이미지나 의미를 되짚어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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