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할 것이 하나 있다. 대학 강단에 선 이후로 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한 학생을 좋아했었다. 성적이 우수하거나 품행이 방정하다는 것은 아마도 평소 매사에 성실하고 노력하고 있다는 표상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교육자로서의 본분을 잊어먹고 이런 학생에게 눈길이 더 간 것은 사실이다. 특히, 법학 교육이 법과대학에서 법학전문대학원으로 교육체계가 전환된 후에는 더욱더 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한 학생이 마음에 들었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을 해 우수한 법조인 내지 법률가가 되어 사회에 기여할 것이라고 부푼 기대감으로 학생들을 바라보기도 했다. 이런 우수한 학생들로 인해서 훌륭한 학교에 훌륭한 선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숨은 욕망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약간 이해가 더딘 학생이나 논점이나 쟁점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독자적인 의견을 이야기하거나 아주 기본적인 내용을 모르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 속으로 ‘큰일 났네’, ‘이런 것도 왜 모를까?’, ‘법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구나’라는 등의 평가와 함께 마음의 짐처럼 생각했다. 아마도 우수한 법조인만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자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모든 학생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한 학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즉 좋은 학생을 시장에 내놓으면 잘 팔리는 좋은 상품과 동렬에 놓고 비교한 셈이다. 그리고 나는 좋은 상품을 많이 만들어 내어야 하는 제조업자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필자에게 회개의 기회가 왔다. 2012년 연구년을 가 있는 동안 산책을 많이 하게 되었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갑자기 내가 수업시간에 한 말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여러분의 이름값, 즉 브랜드 파워(brand power) 내지 브랜드 밸류(brand value)를 높여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갑자기 ‘큰일 날 말 했었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교육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구나’하는 자책감이 생겼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나의 속물적인 성격에 대해서도, 교육에 관한 철학이나 이해가 부족했다는 부끄러움도 생겼다. 자연스럽게 교육에 관한 나의 생각도 바뀌었고, 바뀌고 있는 중이다. 너무 시류에 합류하려는 집착도 사라지고 있다. 따라서 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한 학생도 좋지만, 굳이 성적이 우수하지 않더라도, 또는 품행이 방정하지 않더라도 사회에서의 역할과 기능이 있을 것이고 이유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모든 학생 개인은 인격체로서 상품이 아니고 이 지구 상에 존재하는 작품이다. 작품은 그 자체로서 가치와 존재 의의가 있다. 어쩌면 그 학생은 내가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보고 있을 수도 있고,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법학지식보다도 더 훌륭한 법학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 오히려 나의 마음이 더 편안해지는 것 같다. 무엇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되었다는 느낌도 가진다. 사람 보는 눈도 달라지는 것 같다. 연구실로 출근할 때나, 강의실에서 강의할 때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학생에 대한 교육을 느슨하게 하거나 소홀히 한다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계승균(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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