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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이념 전쟁, 예술로 피어나다
  • 박정우 기자
  • 승인 2016.05.23 00:47
  • 호수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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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7월 17일, 모로코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켜 바다건너 스페인 본토에 상륙한다. 이에 대응해 세계 각지의 청년들이 공화국 수호를 위해 스페인으로 건너 온다. 이로써 유럽의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는 3년에 이르는 전화에 휩싸인다.

쿠데타에 좌절된 스페인식 민주주의 실험

스페인 내전의 기원은 1873년에 성립된 제1공화정에서 찾을 수 있다. 스페인 내전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는 공화파와 국가주의자(파시스트)의 대립 구도가 이 때 처음 드러나기 때문이다. 권미란(부산외국어대 스페인어) 교수는 “스페인 내전은 이념전쟁”이라며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의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한 것이 내전의 원인”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공화파를 배양한 신생 공화국은 군부 쿠데타로 일 년 만에 전복된다.
이후 왕정이 복고된 스페인은 계속되는 사회 소요에 몸살을 앓았다. 농민들은 지주의 수탈에 대항해 토지 점거나 소작 쟁의에 나섰다. 노동자 계급 역시 자본가에 맞서 동맹과 파업으로 실력을 행사했다. 이렇게 성장한 민중의식은 △가톨릭교회 △군부 △대지주 같은 보수세력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런 갈등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본격화됐다. 중립을 선언했던 스페인은 수출로 큰 이윤을 얻었다. 하지만 사회 고위층이 대개의 이익을 선점했고, 인플레이션으로 기층민의 경제적 빈곤은 극심해졌다. 이에 1917년 양대 노동조합인 ‘노동총동맹(이하 UGT)’과 ‘전국노동조합(이하 CNT)’이 합세해 총파업을 벌였다. 이에 당황한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해 노동자 수백 명을 학살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사회적 갈등이 가중되는 가운데 1923년에는 프리모 데 리베라에 의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는 보수 세력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장악한 후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해 입헌군주국이었던 스페인의 헌법을 중지하고 의회를 폐지했다. 골칫거리 같았던 노동조합의 분쇄를 위해 노동조합 해산령도 발표했다. 하지만 군부 정권은 세계 대공황으로 실각했고, 1931년 4월에는 제2공화정이 성립돼 ‘스페인은 노동자들의 공화국이다’를 1조로 하는 헌법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파시스트에 무너지는 제2공화국

제2공화정은 정파 간의 정권 다툼으로 점철됐다. 이 가운데 1936년 2월 총선은 스페인 내전의 서막이 됐다. 진보 세력인 UGT와 CNT가 합세해 ‘인민전선’을 형성했고, 이 선거에서 과반을 차지해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에 보수파들이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7월 모로코에서의 반란을 시작으로 기득권층의 지원 아래 군부 인사들이 결집했다. 이에 쿠데타 세력은 스페인 북부 부르고스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수반으로 하는 국민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스페인 내 ‘반동 우익 세력’에 대항해 유럽 내 좌파들의 결집이 시작되자 유럽 전역이 뒤끓기 시작했다. 정부 차원에서는 소련 정부가 물자원조 제공과 군사고문단 파견으로 공화정부를 도왔다. 하지만 프랑코 군을 지원하던 독일이나 이탈리아를 불필요하게 자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가 내전 불간섭을 선언하자, 유럽 내 좌파 지식인들은 민간 차원에서 ‘국제여단’을 조직해 스페인 공화정부를 지원했다. 여기에는 프랑스와 영국뿐 아니라 미국과 멕시코 등 세계 각지 50여국 4만여 명의 청년들이 참가했다. 류한수(상명대 역사콘텐츠학) 교수는 “국제여단은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공화파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세계 각지의 민주주의 수호자들이 힘을 모은 것”이라며 “초기 공화파 세력이 군사적 열세를 극복하고 전쟁을 대등하게 끌어가는 데 일정의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양측의 접전은 3년간 이어졌다. 수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소모적인 게릴라전과 정규전이 이어지며 이 기간 동안 30만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공화정 수호라는 기치를 명분으로 타국의 내전에 참여했던 국제여단은 열세를 뒤집지 못하고 1939년 2월 스페인에서 철수하게 됐다. 이 해 3월 마드리드는 프랑코 군에 의해 점령됐다.

스페인 내전, 세계대전과 철권통치로 남다

  스페인 내전은 1939년 프랑코의 정권 탈취로 마무리되지만, 이후 세계사에 더 큰 여진을 남겼다. 같은 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이는 스페인 내전에서 좌우파의 갈등이 격화됨으로써 강대국들의 이념 대립 구도가 명확해졌기 때문이었다. 권미란 교수는 “스페인 내전에서 자본주의 블록과 사회주의 블록이 격렬하게 충돌했다”며 “세계 대전과 냉전으로 이어지는 좌우 대립 구도의 시작을 스페인 내전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내전의 여파는 스페인 국내에도 짙게 남아 국민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다. 물가가 급등해 소득을 앞질렀다. 전쟁으로 인해 인프라가 파괴되고, 식량 생산도 급감했다. 정권을 장악한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총통의 자리를 지키며 스페인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그는 인권을 탄압하고 비민주적인 통치로 일관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공화파 인사들은 투옥되거나 망명을 떠나야 했다. 프랑코는 독재와 철권통치로 많은 유럽 국가들의 지탄도 받았다. 이로 인해 스페인은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로부터 외교적 고립을 당했다. 박구병(아주대 사학) 교수는 “프랑코 정부의 정책과 태도가 스페인의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다”며 “경제 발전의 면모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민주화가 후퇴된 시기였다”고 전했다. 

박정우 기자  wjddn132@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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