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대학 전공이 무엇이니? 역사교육과? 그렇다면 나중에 역사교사가 되겠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이다. 역사교사가 되려고 역사교육과에 왔고, 그것은 우리 과의 대다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당연히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의 진로희망은 3년간 줄곧 사학자, 교사, 역사교사와 같은 것들이었다. “저는 공무원이 되고 싶어요” 하면서 역사교육과에 오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역사교사’가 되기 위해 이 학과에 왔다. 하지만 꿈꿔 왔던 대학에 입학하여 폭풍 같은 적응 기간이 끝나고 학기 말이 되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허무함과 무기력함이 찾아왔다. 내가 접한 대학 공부는 따분한 것이 너무 많았고,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는 굴레를 해방시킬 수 있는 열쇠가 필요했다.
당연한 수순이기는 했다. 중·고등학교 내내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정해진 과정을 밟기만 하면 다음 코스인 대학에 갈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었다. 대학도 마찬가지이다. 역사교육과가 제공하는 커리큘럼을 정상적으로 밟고, 관문인 임용고시를 통과하면 ‘역사교사’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역사교사가 되기 위해 대학에 다니고 있다’라는 문장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장 두려운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역사를 가르치고 남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대학이라는 공장에서 찍어낸 생산품과 같은 존재다. 선생님이라는 단어는 큰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했기에 이것은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어떤 학교의 우등생이 이런 말을 했다. “지금 나에게 꿈이 없지만, 꿈이 생겼을 때 성적이 꿈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공부를 한다” 굉장히 멋진 말이기도 하지만 같은 반의 어떤 동급생이 들었을 때는 조금 위축될 수도 또는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 말이다. 지금 당장 내가 이 말을 듣는다면 마음속으로 격렬하게 거부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정해진 틀 안에서 자신의 꿈을 이룰 수는 없는 법이다. 꿈이라는 목적성 뒤에 자신이 만든 틀을 씌우는 것이 맞는 것이다. 길은 열려 있다고 믿는다. 가장 이상적인 것이 가장 현실적인 것이라 말하는 철학자도 있지 않은가.
지금 현재 내 꿈은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교사라는 호칭은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틀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어떠한 사람이든지 나에게서 무언가를 배워갈 것이 있다고 느낄 때 자연스럽게 붙이는 호칭이다. 다양한 환경과 삶을 겪어온 사람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역사를 가르칠 수 있을 때 ‘역사교사’라는 호칭은 쓸모없어진다. 역사를 배우기 전에 사람을 배워야 하며 그 속에서 역사를 녹여 내야 한다. 이것에 대한 생각이 대학에 들어와 1년 동안 했다고 하는 일의 전부이다.
마라톤 대회에서 남들이 한창 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신발을 고르고 신발 끈을 묶었다. 잘 묶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신발 끈을 묶는 동안 심호흡 한번과 뻥 뚫린 대회장을 바라볼 수는 있었을 것이다. 맨 뒤에 섰기에 나를 조급하게 할 경쟁자는 없다. 이제 뛸 시간이다!  

강양택(역사교육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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