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그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영화상영이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에서 자주 듣게 되는 질문 중 하나다. 어떤 감독은 질문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상세한 답변을 내놓는다. 어떤 감독은 구체적인 답변을 피한다. 당장 그 자리에서는 후자보다 전자의 태도가 훨씬 호감을 얻겠지만, 답변을 구한 것이 그렇지 못한 경우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순 없다. 이 경우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훌륭한 감독들은 명확한 답변을 내놓기를 꺼린다. 자신의 말을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든 사람의 말이 진리라는 환상, 그 세계를 창조했으니 정답을 가진 이도 감독일 거라는 확신. 하지만 제대로 된 감독이라면 그 질문에 답한다는 것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풍부하고 다층적인 결들을 창백하고 납작한 하나의 의미로 축소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질문의 영화를 만든 감독들은 더더욱 과묵해지길 택한다. 영화에 질문을 남겨둔 건, 관객과의 대화에서 혹은 인터뷰 자리에서 정답(만약 그런 게 있다면)을 말해주려고 아껴둔 게 아니다. 결말을 열어둔 채 끝낸 영화라면, “그래서 주인공은 어떻게 됐나요?”라는 질문에 감독이 답할 리 없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도 알 때가 되었다.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예술의 기능 중 하나이자 감독이 답해야 할 의무가 없는 혹은 정답이란 게 따로 있지 않은, 우리에게 주어진 즐거움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영화가 완성되고 나면 질문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문제는, 감독은 질문을 던졌는데 관객은 그 질문을 떠안고 싶지 않다는 데 있다. 그래서 묻고 또 물어서 가끔은 “A는 사실 C를 의미하고, B는 Z의 상징이죠, 결국 제가 말하고자 한 건 현대인의 소외……” 운운하는 그런 류의 답을 얻어내곤 한다. 만족스러운가? 이런 일은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일어나고, 평론가의 비평 혹은 네티즌의 글에서도 볼 수 있다. 영화를 풀어야 할 암호문이나 완벽하게 짜 맞출 수 있는 퍼즐게임이라고 본다면, 그런 도식적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이 안긴 곤혹감과 의혹을 말하기 위해 이렇게 길게 돌아왔다. <곡성>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결코 동의하지 않겠지만, 내 생각에 이 영화는 불가능한 퍼즐게임, 메시지가 비어있는 암호문과도 같았다. 우연한 비극, 편재하는 악, 침묵하는 신, 믿음 없는 인간의 처절한 고투와 실패를 그린 거대한 묵시록이 되고자 했으나 어쩌다 보니 정교하게 세공된 괴이한 잡종 호러 코미디가 되고 만 것인지, 혹은 애초의 의도가 이것이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어느 쪽이든 간에, <곡성>은 (첫 장면에서 암시하듯) 물고기를 낚듯 관객을 낚는 데만 온통 관심을 기울인, 미혹의 영화라는 게 내 생각이다.
<곡성>은 앞선 얘기들의 예외적인 현상들을 줄줄이 낳았다. ‘해석문’을 내놓은 네티즌들이 1개 대대는 족히 넘는 듯하고(평론가들보다 더 집요하게 능동적인 해석을 즐기는 관객들!), 관객과의 대화에서 감독은 퀴즈해설식으로 질문에 적극 답한다(영화는 문제집이고, 감독은 해답지인가?). 그 둘 사이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네티즌도, 감독도, 공모라도 한 듯 ‘A는 C를 의미하고, B는 D와 결국 같은 것이고, E는 Z의 상징’이라는 식으로 영화를 ‘해석’해 보인다. 분석도 아니고 비평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출의도도 아닌, 해석. 나는 수학문제처럼 풀이 대상이 된 영화 앞에서 망연자실해진다.
<곡성>은 질문의 영화가 아니다. 의문은 쌓이지만 그게 질문일 수는 없다. 나홍진은 짐짓 의미심장한 듯 늘어놓은 온갖 단서들을 조합해서 수수께끼를 풀어보라고 제안하면서 가짜 미끼를 잔뜩 뿌려놓았다. 이건 어찌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 풀어낼 수 없는 기만적인 퍼즐이다. 보기 드물게 탁월한 촬영과 공들인 미술, 무시무시한 연기가 이렇게 낭비된 것도 못내 아깝다. 감독만 아는, 아니 실은 그 자신도 잘 모르고 한 이야기 앞에서 자꾸만 중얼거리게 된다. 영화는 퍼즐게임이 아니라고.

강소원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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