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변한 대학이 없어서 경남과 부산의 우수 학생들이 서울로 가면 경남의 부가 서울로 빠져나갑니다.” 후일 우리 학교 초대총장으로 임명되는 윤인구 선생은 이 말을 통해서 부산·경남지역에 우수한 도립대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하여 지역 주민들, 기업인, 관료들의 후원으로 대학 설립 기금이 마련되었다. 일제강점기 해방 후, 최초로 국립대학이 세워졌다. 국립대학이었지만 1949년까지 국가에서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은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도민들의 성원으로 대학 설립기금이 마련되었을 뿐 운영기금은 턱도 없이 부족했다. 변변한 교육 시설을 갖출 수 없어서 신입생 정원수를 줄인다거나 도서관 설립을 위해 구매한 책을 창고에 묵혀 두는 등 운영에 지장이 생겼다. 이는 우수한 교수진 확보의 어려움으로 이어졌고, 장학 등 학생들의 복리에 신경 쓰기가 힘들었다. 이를 비관한 많은 학생이 서울권 대학으로 이탈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교육부는 우리 학교가 총장직선제를 고수했다는 이유로 재정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많은 예산이 걸린 사업에서 우리 학교를 탈락시키는 방식을 쓰기도 하고, 취업률이 높지 않은 학과의 통폐합을 요구하기도 한다. 재정적 지원이 올가미가 된 것이다.
현 교육 체계에서 대학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은 어렵고, 결정권과 예산이 중앙으로 집중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성은 과거에도 있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대부분의 서울권 대학이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왔다. 전시에도 대학 운영을 위해서 고군분투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 일은 한국 교육계에 충격을 주었다. 서울이 점령당하자, 서울에 집중되어 있던 고등 교육이 모두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 백낙준 장관은 교육의 지방 자치를 약속했다.
많은 중·고등학생들은 70년 전과 다름없이 ‘인서울’을 목표로 한다. ‘지방 대학에 입학해, 그곳의 인재가 되겠다’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윤인구 초대총장의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지역의 부와 인력이 빠져나간다. 부산은 지금도 제2의 도시라고 불리지만, 청년층이 빠져나가는 속도는 무섭다. 이는 우리 학교가 기반을 가지고 있는 지역 사회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영광스러운 개교 70주년을 맞이하는 부산대의 어깨는 무겁다. 부마항쟁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민주화의 보루’가 여전히 부산대를 수식한다. 총장직선제를 외치면서 지난해 학내구성원 한 명을 잃기도 했다. 외부의 상황은 여전히 열악하다. 그렇다고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가 많다. 중앙을 견제하는 역할에서, 명문 국립대로 비상하기 위한 연구 역량 강화, 민주적인 사회 건설을 위한 든든한 버팀목의 역할이다. 부산대는 70년 간 배움을 향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 덕분에 한국 사회의 격동기 속에서도 계속 발전할 수 있었다.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부산대. 이 과제들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70년 전처럼 선각자 한 명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교수, 학생, 직원 모두의 애정과 협업이 필요하다. 효원인들은 진리, 자유, 봉사라는 이 세 가지 건학 이념을 마음에 얼마나 새기고 있는가. 7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어야 하는 것은 효원을 상징하는 기개와 건학 정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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