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유재산은 부정된다. 모든 사람은 능력과 기 여 수준에 무관하게 공동창고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꺼내와 쓸 수 있다. 크로포트킨의 이상사회 이야기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공산주의와 비슷해 보이지만 여기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마저 부정된다. 중앙집권적 권력기구는 인간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은 1842년 러시아 명문 귀족가문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은 크로포트킨은 근위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장교로 시베리아에 파견됐다. 군 업무 외에 지리학을 익힌 그는 명문 귀족이자 장교로서, 혹은 촉망받는 지리학자로서 얼마든지 안락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베리아에서 행정기구가 결코 민중을 위해 사용될 수 없음을 느꼈던 그는 아나키즘을 선도하던 쥐라연합과의 만남을 계기로 귀족 작위를 버리고 본격적인 아나키스트로 거듭났다.
이후 러시아에서 비밀조직인 차이코프스키단에 가입해 활동하던 크로포트킨은 경찰에 체포돼 2년간 감옥생활을 하다 국외로 탈출했다. 이 무렵 또 다른 아나키즘 사상가인 미하엘 바쿠닌과 교류하며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에서 칼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판했다. 러시아 혁명 후 고국으로 돌아와 아나키즘 운동을 전개했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주창한 볼셰비키에게 주도권은 내줬고, 이후 볼셰비키 독재에 항의했지만 묵살당했다. 결국 크로포트킨은 쓸쓸히 말년을 맞이했다.
크로포트킨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 모두에 반대했다. 따라서 사유재산은 물론 중앙집권적 국가조직 자체를 부정했다. 대신 상호부조적이고 자율적인 공동체, 일명 코뮌(Commune)을 중심으로 조직된 연방을 주장했다. 하승우(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는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함> 번역본 해설에서 ‘보통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아나코 코뮌주의라고 한다’며 ‘크로포트킨은 다양한 형태의 자율적인 코뮌이 만들어지고 그런 코뮌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합하는 질서를 지지했다’고 설명했다. 크로포트킨이 보기에 공산주의는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로 운영되는 강력한 국가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그는 군대와 감옥으로 대표되는 지배질서 자체를 철폐의 대상으로 봤다.
이 같은 사상의 기반에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존재했다. 크로포트킨은 찰스 다윈과 토마스 헉슬리가 구체화한 상호투쟁과 적자생존의 개념을 반박하고 상호부조론을 내세웠다. 그에 따르면 협력과 연대는 진화를 위한 중요한 요소였으며, 인간본성에도 뿌리 깊게 박혀있는 것이었다. 크로포트킨의 <만물은 서로 돕는다>를 번역한 김영범 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크로포트킨은 인간이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고 스스로를 절제하며 이웃과 연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권력관계나 관료제도, 인간을 불필요하게 억압하는 요소들이 철폐되는 무정부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이 믿었던 인간의 절제력과 연대의식은 현실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은 <청년에게 고함> 번역본 서문에서 ‘강권적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인이 자발적으로 연대하는 코뮌사회를 꿈꾸었던 아나키스트는 모든 곳에서 패배했다’며 ‘어쩌면 아나키즘은 인간의 진화 단계에 비추어 봤을 때 너무 일찍 세상에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탄식했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의 외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울림을 가진다. 이영석(광주대 영어영문학) 교수는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혼탁한 현대사회에서 인류의 미래를 밝게 내다보는 그의 낙관론과 인간에 대한 신뢰는 시대 흐름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르겠다’며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바로 오늘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은 더 절실하게 필요한 개념’이라고 밝혔다.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