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남매의 아버지는 자주 모자가 되었다”
황정은의 소설 <모자>는 이렇게 시작한다. 소설 속 아버지는 자신이 왜 모자로 변하는지 모른 채, 순간순간 모자로 변한다. 확실한 것은 ‘좋아서 모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뿐이다. 세 남매는 아버지가 모자로 변한 순간들을 기억해 낸다. 첫째는 골목에서 마주친 초라한 행색의 아버지를 자신이 모르는 척 했을 때, 아버지가 모자로 변했다고 말했다. 당시 아버지는 실직상태였다. 둘째는 고장 난 라디오카세트를 고쳐주지도 새로 사주지도 못하는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르자 모자로 변했다고 했다. 셋째는 학부모 참관일에 참석한 아버지가 화려한 옷차림의 학부모들 사이에서 말없이 모자가 되었다고 전했다.
그동안 한국문학 속에서 아버지는 가장으로서의 위엄과 권위가 있는 ‘왕’과 같은 존재였다. 물론 베스트셀러였던 김정현의 <아버지>나 조창인의 <가시고기> 속 주인공처럼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이들 역시 기존의 아버지 형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자식을 위해 제 몸을 던진 결과, 이들은 잃어버린 가부장권과 남성성을 다시 획득하고 아버지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회복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 서사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아버지가 중심에 있을 때가 아니라 아버지를 바라보는 자식들의 입장이 전면화될 때 발견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해서 슬펐던 ‘홍길동’의 후예는 “애비는 종이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서정주의 <자화상>)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개흘레나 붙여주고 다니는 시시하기 그지없는 인물’이거나(김소진의 <개흘레꾼>), 나를 버리고 사라졌지만 홀로 살아남기 위해 지구 어디선가 열심히 ‘달리기나 하고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김애란의 <달려라 아비>). 이들 작품에서 아버지는 복권 불가능한, 신분이 하락한 비천한 왕이다. 그런데 2000년대 황정은 소설에서 아버지는 한 발 더 나아가 사람에서 사람이 아닌 ‘사물’로 무참히 추락하고 마는 데까지 이른다. <모자>는 그런 ‘사물-아버지’를 바라보는 세 남매의 이야기이다.
소설 속 아버지는 세계의 완강함에 더 버티지 못하고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남매에게 해 주지 못할 때마다 모자가 된다. 모자가 되지 않고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상황을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아버지가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해주지 못하는 상황이란, 간단하게 정리하면 ‘돈’이 없는 상황을 뜻한다. 다시 말해, 모자로 변한 아버지의 모습은 무참하고 초라한 남성, 자본의 가치가 덮어버린 세계에서 제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고 발가벗겨진 한 인간을 지시하는 강력한 직설법이다. 아버지가 모자로 변한다는 환상적인 저 문장은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한 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 위해 씌어지고 있는 것이다.
5월 8일, 올해도 어버이날이 지나갔다. 소설을 읽으면서 되물어 본다. 나의 아버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혹여 모자로 변한 아버지가 차가운 냉장고 밑에 구겨져 있지 않은가, 다음 학기 등록금 걱정하는 자식 앞에서 말없이 모자로 변해 버리지는 않은가.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나는 어떤 눈을 하고 있는가. 소설 <모자> 속 자식들은 모자로 변한 아버지를 동정하지도 힐난하지도 않으며,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는다. 심지어 모자로 변한 아버지에 대해 놀라워하지도 않는다. 모자로 변한 아버지를 밟지 않으려 조심하고, 모자로 변한 아버지가 벽에 걸리지 않게 방 안의 못을 조용히 뽑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자-아버지’와 함께 그저 살아간다. 살아가는 것만이 모자로 변한 아버지가 원래의 아버지로 돌아오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간신히 ‘인간’이기에도 어려운 사회 속에서 그들은 인간다운 방식으로 모자를, 아버지를, 가족 관계를 지키고 유지한다. 아버지의 의무와 자식의 요구가 깨어진 지점에서 다시 발견되는 아버지-자식의 새로운 관계 설정의 가능성이 거기서 싹튼다. 왕관이 아니라 모자를 쓴 아버지가 그렇게 성큼, 우리에게 다가섰다.

오선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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