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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의 역사 속 부산대, 과거와 현재는 어떻게 닿아있을까?
  • 추슬기 간사
  • 승인 2016.05.09 22:35
  • 호수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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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작년 폐지된 기성회비,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기성회비는 1963년 문교부(현 교육부)가 대학의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예요. 우리 학교는 1946년에 세워진 국내 최초의 국립대학이었지만, 해방 이후의 혼란한 상황 때문에 국가의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했어요. 하지만 부산의 유일한 고등교육기관이었던 부산 고등수산학교(현 부경대)만으로는 고등교육에 대한 부산 시민들의 욕구를 모두 수용하기 힘들었죠. 이 때문에 민립대학 설립 기성회 등을 중심으로 부산의 국립대학 설립 운동이 일어났어요.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 학교 학생들은 등록금과 수업료와 함께 기성회비를 냈어요. 하지만 ‘기성회비를 통해서 대학이 부당하게 이익을 얻는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어요. 우리 학교도 포함된 국립대학 학생들의 기성회비 반환 소송에 따라 지난해 폐지되었어요.

02 부경대, 동아대와의 통합이 논의된 적이 있다고요?
해방 직후 각 도에 하나 이상의 대학을 건립하기에는 인적·재정적 한계가 있었어요. 따라서 흩어진 대학설립 기성회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답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부산대학을 신설했어요. 기존에 전문학교로 존재했던 부산 수산전문학교(현 부경대)를 수산대학으로 통합하고, 인문학부는 신설한 것이죠. 하지만 수산대학 학생들의 불만이 커서 시위가 끊이지 않았답니다. 결국 부경대는 별도의 대학으로 분리되었어요.
이외에도 남선대학 설립기성회가 별도로 대학설립을 준비했어요. 남선대학 설립기성회는 부산대학 설립 기성회로 통합되는 것을 반발하고, 독자적으로 사립학교인 남조선대학(현 동아대)을 설립했어요.

03 개교 당시 어떻게 통학했나요?
현재 부산캠퍼스에는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발이 되어주는 순환버스가 있지요. 당시에는 대연동에 캠퍼스가 있었는데, 대연동 방향으로 버스가 하루에 두 편밖에 운행되지 않았어요. 지금은 없어진 전차도 범일동까지만 운행되었죠. 학생들의 통학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화물트럭을 통학용으로 운영했어요. 흙먼지를 날리면서 교수와 학생이 구별 없이 함께 타고 있던 이 통학 트럭은 당시의 진귀한 광경이었다고 해요. 화물트럭 속의 사람들, 상상이 되나요?

04 막대한 양의 도서관 장서는 어떻게 구했나요?
해방 직후에 외국 서적을 수입하는 통로가 막혀 있어서 구입은 불가능했어요. 국내에서 출판되는 서적의 학문적인 깊이는 다소 부족했다고 해요. 당시 윤인구 학무과장은 경상남도 재무청 미국인 고문관의 주선으로 영도에 있는 재무청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약 5만 권의 도서를 인수하게 됩니다. 이 책들은 일본인들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때 압수한 것이었어요. 상자마다 들어있는 책을 확인하기가 어려워서 상자당 100권의 책이 들어있다고 가정하고 모두 500상자 속의 책을 5만 권으로 계산해 총액으로 5만 원을 지불했어요. 아주 헐값에 산 것이지만, 상자 안에는 잡서나 휴지 조각도 많아서 애당초 예상했던 5만 권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해요. 이후에도 사적으로 기증받거나, 미국으로부터 서적 원조를 받아 풍부한 장서를 보유하게 됩니다.

05 우리 학교의 제1대 총장은 누구인가요?
1946년 개교 당시에는 미군정이었어요. 우리 학교에도 미국인인 베커 총장이 1946년 부임했어요. 하지만 그는 1947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베커 총장의 사임 이유에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당시 ‘국대안’이라 불리는 <서울대학교 설립안>이 발표되면서 전국의 학생들이 반발했고, 이 사건이 좌파와 우파의 격렬한 대립으로 이어지기도 했던 학내・외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예상해요. 베커 총장의 사임 이후 부산대학은 사실상 와해됐다고 보고 있어요. 이후 윤인구 전 총장(위 사진 속 인물)의 재건립을 위한 노력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어요.
이후 우리 학교 설립 이후에 지속해서 도움을 준 윤인구 총장 서리가 1953년 총장으로 정식 임명돼요. 그렇기에 윤인구 초대 총장을 제1대 총장으로 보고 있어요.

06 전쟁 중에는 학교가 어떻게 운영되었나요?
서울에서 피란 행렬에 참여한 대학들은 부산에 임시 캠퍼스를 세웠어요. 하지만 인력이나 시설 등이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 학교를 중심으로 전시연합대학이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전시인 상황을 고려해 해당 지역에 자리 잡은 대학의 수업을 수강하면 학점을 인정해주었다고 합니다. 부산에서는 서울대, 부산대, 동국대가 천막 교사를 운영했어요. 우리 학교도 마땅한 건물을 구할 수 없어서 천막에서 교재도 없이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복사기가 없었기 때문에 교재를 만들기 위해서 일일이 타자기로 입력했다고 해요.
또한, 전시인 만큼 많은 사람이 생계를 위해서 낮에는 일해야만 했어요. 등록된 학생들의 대부분이 낮에 수업을 들으러 올 수 없었죠. 이러한 학생들을 배려해 주마다 시험을 쳐서 출석을 인정해주는 제도 등을 도입했다고 해요.

07 전시 학생증은 무엇인가요?
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학생이 참전했어요. 대학에서도 화학과나 교련 수업 등을 개설하면서 전시 상황에 더욱 유연하게 대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어요. 전쟁이 소강상태에 있었던 1952년이 되자 ‘전시 정원제’가 도입돼요. 전시 정원제란 군사훈련을 일정 시수 이수하고, 졸업과 동시에 국군 간부 후보생에 지원할 것을 의무화하는 것이에요. 1961년에 생긴 ROTC(학생군사교육단)제도와 유사한 것이죠. 대신 졸업하기 전까지는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징집이 면제되었어요. 전시 학생증은 징집 면제 대상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신분증명서였어요. 여행 등 다른 지역을 방문할 때 필수적으로 소지해야 했답니다.
대학 재학 동안 징집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학부모는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고 싶어 했어요. 시골의 가난한 농부도 자식의 진학을 위해 소와 전답을 팔았어요. 이러한 수요에 힘입어 사립대학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비싼 학비를 받아 대학의 몸집을 불려 나갔어요. 그래서 우골탑이라는 말이 당시에도 유행했답니다.

08 제1회 졸업식은 어땠나요?
1952년에 대학이 설립된 지 6년 만에 첫 졸업생 252명을 배출했어요. 1952년 3월 31일 제1회 학위수여식이 거행되었어요. 졸업 예정자 가운데 군 관련 25명, 대학원 진학자 24명, 관공서 63명, 교원 40명, 은행이나 회사 70여 명으로 진로가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것을 알 수 있어요.

09 부산 캠퍼스가 원래 무덤가였다는 데 사실인가요?
지금의 장전동 부지는 조선시대 말기에 동래부 사형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이곳에 많은 분묘가 있었다고 해요. 처음에는 이곳에 캠퍼스를 조성하는 것을 알게 된 관리인들이 완강히 반대했지만, 연고자 없는 몇 개의 묘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장했다고 해요. 여러분, 으스스한가요?

10 부산 캠퍼스로 언제 옮기게 된 건가요?
한국 전쟁 등으로 우리 학교는 캠퍼스 부지 선정에 많은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문현동의 부지도 육군이 점령하면서 사용할 수 없게 되고, 충무동 부지도 영국군이 점령했어요. 서대신동의 교사마저 피난민을 수용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천막생활을 하던 우리 학교는 전쟁 후에 마땅한 부지 물색에 총력을 가했죠.
윤인구 초대 총장의 노력으로 장전동의 광활한 캠퍼스 부지를 무상으로 받게 되었어요. 사유지는 구매하거나, 장전동 주민의 기증으로 캠퍼스로 확보할 수 있었어요. 지금처럼 부산 캠퍼스의 자연환경은 아름다웠지만, 당시에는 암석, 잡초, 잡목 등이 무성했다고 합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학습 공간에 맞게 꾸리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어요. 흩어져 있던 단과대학이 장전 캠퍼스에 옮기게 된 것은 1956년 이후였어요.

 

   
현재 부경대가 위치한 대연동 구교사의 모습이다
   
1948년의 예과수료증서

 

   
1954년 12월, 기공식 후 장전동 교사 부지를 다지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다

 

추슬기 간사  union2333@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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