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원자재의 왕’이라 불리며 세계의 상품 시장을 주름잡았던 석유의 가격이 두드러지게 하락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배럴 당 30달러에서 시작한 국제 유가는 장기적 상승 대세 국면 속에 2008년 7월 14일에는 ‘서부텍사스산중질유(이하 WTI)’ 기준 배럴 당 145달러로 정상을 찍었다. 이런 현상이 계속되자 당시 월가의 투자은행들은 앞다퉈 석유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내놓기 시작했다. 심지어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는 ‘향후 2년 내 국제 유가가 배럴 당 200달러를 돌파할 것’이라고 발표해 고유가 시대의 지속을 점치기도 했다.

‘26달러’,
경제 위기 속 바닥치는 원유가

그러나 이런 흐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2008년 여름이 다가오자 무분별한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초래된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한 것이다. 금융위기라는 경제 공황 속에 세계적인 소비와 투자 위축이 나타나자 원유가는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실제로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국제 원유 가격의 기준인 WTI는 2008년 12월 22일 배럴 당 31달러로 장을 마쳤다. 추락하기 시작한 석유의 입지는 시중에 직접적으로 통화를 공급하는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과, 신흥국인 중국과 인도의 석유 소비 증가로 가까스로 반등할 수 있었다.
이후 대체로 안정적인 가격을 유지하던 석유는 2014년 6월부터 끝없는 수렁에 빠지기 시작했다. WTI가 지난 2월 11일 배럴 당 26달러로 사상 최저치를 찍은 것이다. 세계적으로 수요를 견인하던 중국 경제가 2012년을 기점으로 저성장 국면에 들어섰고, 신기술의 개발 속에 북미를 중심으로 셰일 가스 같은 비재래석유가 원유 시장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즉, 수요의 둔화와 비약적 공급 증가 속에 석유의 수급 균형이 깨진 것이다. 손양훈(인천대 경제학) 교수는 “원유가 하락은 기본적으로 공급이 수요보다 커진 데에 원인이 있다”며 “고유가 속에 이익을 늘리기 위해 산유국들이 투자를 늘려 비전통석유까지 확보해 공급을 늘린 반면, 중국과 유럽 경제권의 경기 침체가 심화돼 수요가 감소했다”고 밝혔다.

석유 제국의 몰락,
“카르텔 유지 못해”

석유의 위상이 흔들리자,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이른바 ‘석유 제국’들의 힘이 덩달아 축소됐다. 심지어 정권 붕괴 전조까지 나타나고 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가들은 기존에 누리던 복지를 유지하기 위해 원유 감산이 아닌 증산을 선택했다. 과거처럼 감산을 통한 가격 상승을 위해 단결하거나 카르텔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단기적 이익에 매몰돼 파괴적 경쟁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 때문에 남미의 대표적인 산유국인 베네수엘라의 경우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전기와 물 부족에 시달리며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다. 계속된 원유 증산에 지친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비전 2030’을 발표해 파행적인 석유의존형 경제를 탈피하고 다양한 신산업 육성을 정책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최기련(아주대 에너지학) 교수는 “베네수엘라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들은 석유에 중독된 사회”라며 “저유가가 계속되자 베네수엘라는 국가 파산 지경에 이르렀고, 세금이 없던 사우디아라비아는 면세 범위를 축소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양준석(가톨릭대 경제학) 교수도 “현재의 석유 시장 구조는 어떤 나라라도 증산을 통해 석유를 싸게 팔면 시장을 석권할 수 있는 구조”라며 “석유 증산의 유혹이 존재하는 이상 석유수출국기구라는 카르텔을 개별 국가들이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전했다.
이런 상황에는 지정학적 요인도 한몫했다. 작년 7월 이란의 핵 개발을 제한하는 대신 경제 제재 조치를 해제한다는 ‘이란 핵 협상’이 타결된 것이다. 이로써 2012년 취해진 경제 제재 조치 이후 본격적인 경제 개발 궤도에 올라선 이란은 자본 마련을 위해 지속적인 석유 증산을 시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미국과 이란의 정치적 의제가 석유 공급을 늘려 유가 하락을 가속화 시킨 셈이다. 여기에 더해 이란과 종교 종파 문제로 대립하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의 패권국 지휘를 노리는 이란에 대응하기 위해 석유 증산을 감행하는 이른바 ‘치킨 게임’을 벌이고 있다.

유가하락의 원인은
넘쳐나는 공급

지속적인 유가 하락의 국면에 처해있는 석유에 대한 전망은 현재로서 비관론이 다수인 상황이다. 비관론의 원인에는 먼저 셰일가스의 등장을 들 수 있다. 미국과 캐나다를 중심으로 시추법 등 에서 신기술 개발이 성공함으로써 자원의 채굴 비용이 감소했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과거 비싼 채굴 비용으로 포기했던 샌드오일이나 셰일가스를 캐내더라도, 경제적 채산성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즉 셰일가스가 석유의 대체제로 설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최기련 교수는 “셰일가스의 등장으로 과거 필수재 같았던 석유의 중요성이 떨어졌다”며 “이 때문에 필수재를 빙자한 가격 독점이라는 기존 석유시장의 시장 실패가 보정되고 있다”고 밝혔다.
두 번째로 미국의 석유 수출시장 진출을 들 수 있다. 작년을 기점으로 전 세계 석유 소비의 20.7%를 차지하는 미국의 자국 내 원유 생산량이 수입량을 뛰어넘었다. 이에 작년 미국은 원유 잉여분을 처리하기 위해 40년 간 존속했던 석유수출금지법을 폐지했다. 따라서 석유 시장에서의 수급 불균형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손양훈 교수는 “미국이 고갈을 대비해 보험적 역할로 금수품목화 했던 석유가 수출되기 시작했다”며 “세계 최대 석유 수입국인 미국이 석유 수출국이 됨에 따라 세계의 석유 공급은 더욱 증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기축통화를 보유한 미국이 고금리정책을 펼치는 것도 석유의 가격 상승 전망을 어둡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고금리정책으로 인해 미국 달러화의 강세가 계속되면 달러로 표시된 원유의 가격은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온기훈(숭실대 경제학) 교수는 “당분간 달러 강세가 계속될 것”이라며 “이외 여러 요인을 감안해도 과거와 같이 유가 100달러 이상의 고유가 시대는 생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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