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는 지하에서 천연 생성된 액체 탄화수소를 주성분으로 하는 가연성 기름을 일컫는다. 지금처럼 석유가 에너지자원으로 사용되기 전부터 인류는 다양하게 석유를 사용해왔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석유의 고체형태인 역청을 파라오 시체의 방부제로 사용했고, <구약성서>에 따르면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에도 역청을 사용했다고 한다. 1299년에 쓰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코카서스 산맥의 사람들이 석유를 등잔의 원료나 피부질환 치료약으로 사용했다고 기록돼있다. 이런 석유를 주요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게 된 역사는 길지 않다. 185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진행된 상업용 석유시추를 시작으로 20세기 기계문명이 꽃을 피우며, 석유는 기존 주류에너지로 사용되어온 석탄을 대체하게 됐다. 이외에도 석유가 상업적으로 부상한 것에 대해 손양훈(인천대 경제학) 교수는 “원유는 어떤 형태로 정제하든지 간에 쓸모 있는 에너지원이 되기 때문”이라며 “예컨대 의약품이나 옷 등 다양한 생활용품이 모두 석유를 기초 소재로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석유로 쓰여진 산유국들의 역사

1960년 석유수출국기구(이하 OPEC)이 생겨나기 전까지 세계 석유시장은 거대 석유회사들에 의해 돌아갔고, 산유국들은 이들에게 종속된 관계였을 뿐이었다. 초기 OPEC에 소속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이란 △쿠웨이트 △베네수엘라이다. 이 5개국은 미국과 영국의 거대 석유회사들이 싼값에 원유를 사들여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는 반면, 산유국들은 이익을 보지 못하는 상황을 타파하고자 했다. OPEC이 출범한 후, 거대 석유회사들이 장악하고 있던 석유시장의 주도권은 여러 차례의 석유파동(Oil Shock)을 겪으며 OPEC 소속 산유국에 넘어갔다. 우리 학교 원두환(경제학) 교수는 “초기 산유국들은 석유를 많이 판매해서 단기적 이득을 보는 데 급급했다”며 “OPEC 등장 이후 산유국들이 협상을 통해 석유 생산량을 조절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세계 2위 석유 생산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1932년 재위한 초대국왕 ‘이븐 사우드’가 석유발굴 기술을 키웠고, 석유회사 ‘아람코’가 사우드 왕가의 왕조적 독재를 유지하면서도 석유생산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데 공헌했다. 하지만 미국 석유회사 네 군데가 관여돼있던 아람코에 대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생산은 미국과 종속관계를 띠게 된다. 이후 석유광물자원부 장관 ‘자키 야마니’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 이권에 있어 미국과 동등한 관계를 인정받으려 석유 정책을 펼쳤고, 이는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생산의 근본적 변혁을 불러일으킨다.
남미의 베네수엘라는 1908년부터 27년간 후안 비센테 고메스가 독재정권을 펼쳤다. 그가 부의 축적과 독재를 동시에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1918년에 시작된 석유의 생산 덕분이었다. 1928년에는 세계 1위 석유 수출국이었을 정도로 석유 생산량이 급증한 베네수엘라는, 이후 여러 차례의 정권교체를 겪으며 석유 가격에 따라 국내경제가 좌지우지되는 양상을 띠게 된다.

미국의 석유 쟁탈전,
전쟁마저 불사하다

미국은 최초의 상업용 유전을 발견한 뒤로, 세계 7대 석유회사 중 5개사를 소유하는 등 세계 석유시장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원두환 교수는 이에 대해 “석유는 150여 년이 넘도록 여전히 중요한 자원이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안정적 확보가 필요하다”며 “미국은 석유 수요가 세계 최대인 만큼, 석유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석유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말했다. 미국은 석유 이권을 챙기는 데 방해가 되는 국가의 세력들을 제거하기도 했는데, 1953년 이란 쿠데타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는 1950년 이란의 모사데그 총리가 석유를 국유화시키면서 일어난 사건인데, 이로 인해 당시 이란의 석유 이권을 가지고 있던 영국과 미국은 큰 타격을 입게된다. 이후 미국은 국유화 선언 철회를 위해 이란의 자헤다 장군이 군부쿠데타를 일으켜 모사데그 총리가 물러나게끔 하도록 배후지원 해줬다. 그 결과, 1979년 호메이니 혁명으로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미국 거대 석유회사들은 이란의 석유 이권을 챙겨 갔다.
이처럼 석유는 분쟁의 주요 원인이 돼왔다. 미국이 석유 이권을 찾으려 이라크와 전쟁을 벌인 것이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석유매장량 2위인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의 석유 국유화로 인해 미국의 거대 석유회사들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2003년 부시 대통령은 독재로 고통 받는 이라크 국민의 해방 및 이라크가 대량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명목하에 이라크를 공습했고, 5년간의 긴 전쟁 끝에 3만 명의 사망자를 남겼다. 석유를 두고 벌어진 이 전쟁은 결과적으로 국제유가가 폭등하는 시발점이 됐고, ‘미국 외교정책의 가장 큰 실패작’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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