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사라마구가 쓴 <눈먼 자들의 도시>에는 눈을 멀게 하는 전염병이 나온다. 어느 날 불쑥 발생한 그 병은 순식간에 퍼져서 세상 사람 모두를 맹인으로 만들었다. 맹인이 된 사람들은 먹이를 찾아서 네 발로 기어 다니고, 그 와중에 굶고 다치고 병들어 죽으면 개와 까마귀가 시체를 먹어치운다. 그런 면에서 이 은행장은 운이 좋았다.
“그가 탄 엘리베이터가 십오 층을 목표로 올라가다가 정확히 구 층과 십 층 사이에 이르렀을 때, 전기가 나갔다. (중략) 전기는 그 이후 다시 들어오지 않았고, 그 날 은행 안에서는 실명 환자가 급증했다. 따라서 은행장과 비서는 여전히 엘리베이터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강철로 된 관(棺) 안에 갇힌 채 죽었을 것이며, 따라서 다행히도 탐욕스러운 개들로부터는 안전했다”
아, ‘강철로 된 관’이라! 어떻게 이런 표현을 썼을까. 은행장이 타고 있던 엘리베이터를 말하는 게 분명하다. 정전 때문에 멈춘, 하필 9층과 10층의 한가운데여서 어떻게 문을 열더라도 막혀있을, 마침 그날 은행직원 대부분이 눈멀어서 구조 가능성도 전혀 없는, 철저히 단절되고 고립된 그 엘리베이터를 말하는 게 틀림없다.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그것을 보며 작가는 승강기(Elevator)라는 무용한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내려주었나니, 그것이 바로 관이었다.
관이 무엇인가? 죽은 자를 담는 상자다. 망자를 감추는 장막이요,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장벽이요, 이승과 저승을 분할하는 경계다. 그래서 죽은 자는 명계를 벗어날 수 없고 산 사람은 저승으로 침투할 수 없는 법이다. 마치 은행장이 탄 엘리베이터처럼 안에 든 사람은 자력으로 나갈 수 없고 밖에 있는 사람은 도울 능력이 없는 게다. 이 얼마나 완벽한 비유인가!

배한오(정치외교학 석사 16)

죽음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솔직히 ‘죽음’만 들으면 떠오르는 게 별로 없다. 그래서 작가들은 죽음 자체를 묘사하지 않고 죽음과 관련된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피, 비명, 고통, 눈물, 정적, 검은 옷, 흰 국화…. 그러니까 ‘죽어가고 있다’고 하지 않고 ‘바닥이 붉게 물들었다’, ‘무시무시한 침묵만 흘렀다’, ‘검은 장벽이 들썩였다’ 같이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법이다. 나는 그런 죽음의 우회적 이미지에 관도 포함된다는 것을 배웠다. 한동안 나는 죽음의 이미지와 관의 상징성에 대해서 고민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세월호가 침몰했다. 아마도 국민 모두가 보았을 사진을 나도 봤다. 세월호 끄트머리가 수면 위에 빼꼼 솟아있던 그 장면을. 그 다음 날의 사진도 봤다. 배는 사라지고 주황색 부표만 떠 있던 모습을.
속에 삼백 명 넘는 승객이 갇혀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거대한 강철의 벽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승객들은 눈멀지 않았음에도 탈출할 수 없었고, 바깥사람들은 눈멀지 않았음에도 도와줄 수 없었다. 결국, 그건 배가 아니라 관이었다. 두 명을 가둔 채 멈춰버린 엘리베이터와 삼백 명을 품은 채 가라앉는 배는 그런 점에서 닮아있었다.
나는 세월호를 보았다. 나는 여지껏 살아오면서 그토록 거대하고 단단하고 차갑고 슬픈 하관식(下棺式)을 본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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