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연해 보인다고 늘 그래 왔던 것은 아니다. 노동조합의 조직형태도 그렇다. 지금은 산별노조든 기업노조든 업종노조든 근로자들 마음대로다. 별도의 규제가 없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 때는 달랐다. 기업노조만 허용했다. 산별노조는 금지되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노동조합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엄혹한 세상이었다. 헌법에 떡하니 적혀져 있는 노동3권이었지만, 그걸 꺼내 드는 순간 고초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땐 그랬다.
그렇게 꺼질 듯 사그라들던 산업민주화의 불씨가 그래도 살아남아 지금에 이른 것은 따지고 보면 기적이다. 누가 뭐래도 일등공신은 노동조합이다. 그들을 통해 근로자들은 자신에게도 정당한 ‘권리’가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랬던 노동조합이 최근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 노동개혁이라는 외생변수 때문에 힘든 마당에, 노조분열이라는 내생변수가 겹쳤기 때문이다. 계기는 지난 2월 19일 ‘발레오전장노조’에 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었다. 노동계는 ‘노동조합 죽이기 판결’이라며 펄쩍 뛰었다. 안으로는 노동 내부의 고민이 깊어가는 게 역력해 보인다. 이유가 뭘까.
사건 내용은 이렇다. 원래 기업노조였던 ‘발레오전장노조’가 외환위기를 넘기면서, 산별노조인 금속노조에 가입하였다. 금속노조의 지부가 된 것이다. 그러다가 ‘발레오전장노조’가 다시 금속노조를 탈퇴하고자 했다. 다시 독립된 기업노조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절차였다. ‘발레오전장노조’는 자체 총회를 거쳐 탈퇴를 결정하였다. 금속노조는 자체 총회가 아닌 금속노조 전체 총회의 결의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탈퇴를 막았다.
1심 법원과 2심 고등법원은 금속노조의 손을 들어 주었다. 대법원의 입장은 달랐다. 하급심판결을 뒤집었다. 이유는 이랬다. ‘노동조합의 조직형태가 산별이든 기업별이든 그건 그 구성원인 조합원의 의사가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요약하면, ‘들어 올 때는 자유고, 나갈 때는 자유가 아니라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너무도 교과서적인 판결이 아닌가. 그래도 걱정이 앞선다. 그나마 사용자와 대등하게 교섭할 수 있는 주체는 ‘산별노조’였다. 혹여 이번 판결이 사용자로 하여금 산별노조의 분열을 조장하지나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실제 몇몇 대법관들은 소수견해를 통해 이러한 우려를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가 ‘보수화된 대법원’ 탓만 해서는 안 된다. 싫어서 탈퇴하겠다는 조합원들을 못 나가게 막을 도리는 없다. 막는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 순서다. 혹여나 산별노조가 ‘나를 따르라’고만 한 것은 아닌지, 조합원들의 고충과 의견을 소홀히 흘려버린 것은 아닌지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산업민주화라는 성과를 뒤로하고, 이제 노동조합 내부의 민주화에도 신경 쓰라고 요구하는 것이 야박해 보일 수도 있다. 사용자와의 대외적 투쟁력과 단결력에 역량을 집중하기에도 벅찬 게 우리 노동조합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과 같은 상태를 방치해 둘 수는 없다. 단언컨대 노동조합의 지속가능한 사회적 영향력 확대는 내부 민주화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외부 투쟁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조합원들 스스로가 조직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부디 이번 대법원 판결이 산별노조에게 쓰디쓴 ‘약’이 되기를 바란다. 유학 시절 동료의 말처럼 노동부장관 이름은 몰라도 금속노조 위원장 이름은 아는 사회가 되었으면 해서다. 이제는 노동조합 2.0을 지향할 때다.
이참에 우리 스스로에게도 되물어 보자. 혹여 밖으로 민주주의를 주창하면서, 안으로는 자유로운 토론과 민주적 의사결정 절차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한 적은 없었는지, 나와 의견을 달리하면 곧바로 ‘반민주’로 몰아세우지는 않았는지를 말이다. 아무리 의도가 선하고, 목적이 타당하다 해도 그래선 안 된다. 

 

권혁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