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선거판을 보면 ‘선거라는 것이 과연 민주적인 제도인가’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부산 출신의 모 정당 대표가 민주적이라고 주장한 상향식 공천제도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고, 큰 손에 의해 후보가 내려 꼽히는 소위 하향식 공천제도라는 비민주적인 괴물이 여전히 횡행하기 때문에 하는 소리가 아니다. 정당의 의사결정이 민주적이어야 하고, 정당원이 후보를 결정하는 상향식 제도가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의 선진국에서 채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우리 헌법에도 맞는 제도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100% 당원 투표로 이루어지는 영·미·독·불 등의 경우와 달리 실제로 당원이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인 정당정치에서는 상향식 제도가 기득권세력이나 돈을 가진 자들에게 유리하다는 비판이 일찍부터 있어왔다. 물론 이번 선거 전에 상향식 제도가 주장되다가 별안간 없어진 이유는 그런 비판 때문이 아니라 종래의 제왕식 정치구조 탓이지만, 결과적으로 기득권세력에 유리하게 된 것은 어떤 제도를 취하건 마찬가지로 비민주적이라는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최근 세계의 400대 억만장자들이 대부분 자수성가형인데 반해 그것에 포함된 한국의 5명만은 상속형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자수성가가 가능하지만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일반화된 진리처럼 되어 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아니 정치가 그렇기 때문에 다른 분야도 그렇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그야말로 금권정치, 소수특권 주의이다. 금수저들이 공약을 남발하여 당선되면 이권 싸움에 박이 터진다. 그래서 루소의 말처럼 국민은 선거 때는 주인 대접을 받지만 선거가 끝나면 노예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아니 노예라는 것도 모르는 바보 노예다.
루소는 정치적 노예제를 면하기 위한 대안으로 추첨제 민주주의를 제안했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처음 실시된 그것은 대부분의 공직 선출을 선거가 아니라 추첨으로 했다. 즉 500인 평의회, 민중법원, 그리고 거의 모든 행정직을 추첨으로 뽑았다. 국정의 기본을 결정하는 민회에는 시민이면 누구나 참석했다. 법안을 준비하고 민회를 열었으며 재정과 공공사업, 행정과 외교를 담당한 500인 평의회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중추로 추첨에 의해 구성되었다. 700개 관직 중 600개는 추첨으로, 나머지 100개만 선거로 뽑았다. 매일 아침 민중법원에서는 6천 명의 시민 중에서 추첨으로 배심원 수백 명을 뽑았다. 이처럼 추첨제는 입법, 행정, 사법 모두에 해당되었다. 나아가 모든 관직의 임기는 지극히 짧았다. 배심원은 하루이고, 평의회와 행정직은 1년이었다. 그 결과 30세 이상 시민 중 50~70%가 적어도 한 번 이상 평의회 의원으로 일했다. 따라서 아테네에는 직업 정치인이 존재하지 않았고 정치인과 시민 사이에는 구분이 없었다. 즉 통치자와 피통치자, 군주와 백성이라는 구분이 없었다. 이것이 민주주의이고 자유였다.
이러한 제도는 그 뒤 르네상스 기에도 실시되었으나 절대왕정 하에서 없어졌고, 이른바 민주주의를 한다고 한 18세기부터 서양에서 실시된 선거에 의한 대의민주주의란 사실상 민주주의로 인한 소요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엘리트 선출제에 불과한 비민주주의적 제도였다. 18세기에도 몽테스키외나 루소 같은 민주주의자들은 추첨제 민주주의를 선호했지만,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 이후 엘리트들은 선거제 민주주의를 고집했다. 그리고 2세기 이상 선거가 곧 민주주의라는 잘못된 생각이 세상을 지배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를 비롯하여 이미 수백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배심재판을 비롯하여 추첨제 민주주의 제도는 캐나다, 네덜란드, 아일랜드, 등 여러 나라에서 선거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선거민주주의도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우리에게는 아직도 요원하게 보이는 추첨제 민주주의이지만 선거만을 생각하는 정치꾼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참된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 세상 어느 나라에서보다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다 

 박홍규
영남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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