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으로 야학이 없어지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이 말은 필자가 금정열린배움터라는 야간학교에 처음 방문했을 때 들었던 이야기다. 야학이 없어지는 것이 목표라니. 이 도발적인 말 속에 담긴 의미는 모두가 정규교육을 원하는 만큼 받는 사회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을 것이다. 필자도 강학이 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 글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이 이다지 많은지 알지 못했다. 야학 학생들의 연령대는 주로 40대에서 60대다. ‘산업화의 역군’들인 셈이다. 공부를 시작하기까지 제각기 다른 사연이 있지만, 유행가의 가사를 보며 부를 수 있게 되고, 주소를 적을 줄 몰라서 관공서에 갈 수 없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학생들은 배움의 기쁨을 토로한다.
필자가 강의하는 과목은 주로 사회, 국사, 국어였다. 야학을 그만둔 뒤에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다룬 수업시간이다. 70대인 늦깎이 학생은 한국전쟁부터 소위 말하는 한국사의 격동기를 살았다. 이 학생은 현대사 수업시간이 되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한국전쟁으로 집 앞마당에 포탄이 떨어지던 날과 5·16 군사 쿠데타로 계엄령이 내렸던 날의 일이다. 하필 입대했던 때 계엄령이 내렸다. 군화를 신고 몇 날 며칠간 대기해야만 했다. 긴장으로 가득했던 날들과 그 이후 바뀐 사회. 이 대목에 이를 때면 몸을 부르르 떤다. 그 생생한 증언 앞에서 모두가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희를 넘긴 학생의 청춘은 계엄령과 ‘억압된 민주주의’로 얼룩져있고, 현재의 20대는 불평등한 경제 구조 속에서 내일을 걱정하며 산다. 노인빈곤율은 46.4%이며 20~30대 청년 실업률은 12.5%를 기록했다. 이에 대해 정치권은 개선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회에 표류 중이던 청년과 복지를 위한 법안은 표류만 하다 자동 폐기됐다.
70대 노인이 청춘일 때도 내일만 보고 살았지만, 지금의 청년들도 그렇다. 절박한 상황에 부닥친 국민의 의사를 대변해줘야 할 국회는 공천을 통한 이익 싸움에만 몰두하고 있다. 노년 세대를 대변하지도, 청년 세대를 대변하지도 못하면서 세대 간 갈등만 부추긴다.
UN이 명명하길, 개발도상국에서 인간적이고 기본적인 삶이 존중받기 위한 중요한 토대는 '선정(good governance)'이다. 민주적이고 다원화된 사회가 확립되어야만 그 이후의 경제성장과 정치적 불안 요소 역시 사라진다. 우리의 정치판은 어떤가. ‘살생부’ 혹은 ‘공천 학살’이라는 말이 난무할 정도로 공천에서 공정성이 담보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국민의 목소리를 듣기보다는 평소 정권에 아부를 잘하거나 ‘승률이 높은’ 사람만이 살아남아 정치 생태계가 더욱 어지러워지고 있다. 무늬만 청년인 젊은 정치인들도 기성세대의 과오를 학습하고 있다.
물론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다수의 지성이 ‘합리적 선택’을 했음에도 실망스러운 사례는 여럿 있었다. 역사상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도 선거를 통해 뽑히기도 했다. 공천에 거는 기대도, 정치인에 대한 기대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정을 위한 토대를 지금부터라도 탄탄하게 다져야만 미래가 조금이라도 나아진다. 그렇기에 양심적이고 유권자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을 뽑는 선거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야 할 것이다. 지금의 20대가 노년층이 되었을 때는 그래도, 뭐라도 바뀌어야 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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