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으로 구성된 평면적인 자료들을 가지고 4차원의 세계를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무의식 상태에서 꾸는 꿈은 우리 안에 그런 능력이 잠재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하지만 깨어 있는 상태에서 다양한 물체들이 생동하는 세계를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마도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잠재 능력을 계발하는 노력을 게을리한 탓일 게다.
  우리는 검은 선이 만들어낸 문자들이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낸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문자들은 기호의 덩어리, 곧 메시지에 불과하다. 메시지는 상상을 통한 해독(Decoding)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의미를 드러낸다. 모든 말과 글은 그 안에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메시지가 자리하는 맥락(Context) 속에서 말과 글의 의미가 형성된다. 맥락을 찾는 과정은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낯선 글일수록 더 많은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메시지와 의미 사이의 자동화된 관계에 익숙해지게 하는 것이 주입식 교육이다. 지식은 인간과 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학문 분야에서 널리 인정받은 것을 말한다. 십여 년 동안 그러한 지식들로 가득한 교과서나 참고서만으로 자동화된 관계에 길들여진 학생은 새로운 글, 낯선 글을 읽기가 어렵다. 오감이 무뎌지고 상상력이 계발되지 않은 까닭이다. 인간은 세계를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고 인간과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래서 지식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주입식 교육을 통해 습득한 지식이 많다고 해서 인간과 세계를 더 잘 이해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런데도 익숙해진 방식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으려는 것이 요즘 대학생의 일반적인 경향인 듯하다.
해마다 봄 학기가 시작되면 자동화된 학습 방식에 익숙해진 새내기들이 이 강의실 저 강의실을 드나든다. 그런 학생들에게 무뎌진 오감과 성장을 멈춘 상상력을 자극하는 강의는 불편하다. 수년 동안 숙면도 취하지 못하고 습득한 지식들이 불완전한 것이라고 암시하는 강의는 불편을 넘어 불안까지 더한다. 몸에 밴 방식으로 지식을 주입하는 강의라야 편안하다. 수강 변경은 불안을 느끼지 않게 하고 편안함만 느끼게 하는 강의를 찾아다니는 학생에게 더없이 좋은 제도이다. 아르바이트하는 데도 지치는 데 강의까지 불안과 불편을 줘서야 되겠는가?
  하지만 점과 선에 얽매여 문자 너머의 세계를 보지 못하면 미래에는 더 큰 불안과 불편을 겪을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내가 습득한 지식이 쓸모가 없어진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 벌써 느끼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밤잠 설치며 배운 지식들 대부분이 딱히 쓸모가 없다는 것을. 편한 강의가 많을수록 대학은 중·고등학교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나는 우리 대학이 불편한 강의들로만 가득 채워지기를 소망한다. 그런 강의라야 우리 학생들이 사소한 불안과 불편을 넘어 깨어 있는 상태에서 4차원의 세계를 그려볼 수 있고, 점과 선으로 이어진 문자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런 능력이 있어야 좀 더 완전한 지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언제쯤이면 우리 대학이 그런 사람을 길러내는 데 매진하는 대학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자문해 본다.

임주탁(국어교육)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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