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생 문필기 할머니는 공부가 정말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로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낙담했다. 어느 날 공부도 시켜주고, 돈도 벌 수 있게 해준다는 동네 아저씨의 말을 믿고 저녁 어스름에 차를 탔다. 부모님께 혼날까 봐 인사도 못 드렸다. 또래 소녀들과 목적지도 모른 채 몇 날 며칠을 실려 다녔다. 도착해보니 만주의 일본군 위안소였다. 할머니는 딱 한 번 몰래 집으로 보낸 편지에 ‘공부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여기까지 왔으니 동생들은 꼭 공부시키라’고 썼다. 기적적으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가족들에게 위안부였다는 말은 못했다. 그러던 그가 용기를 낸 것은 TV에 나온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때문이었다. 억울해서 신고했다. 이는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 수록된 ‘하도 공부가 하고 싶어서’라는 제목의 문필기 할머니의 증언을 요약한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공식적인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피해자들이 용기를 낸 덕분에 잔혹한 역사와 ‘진실’에 근접할 수 있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취업사기, 폭력, 인신매매 등으로 끌려갔다. 위안소에 끌려간 사람들이 최소 3만 명에서 최대 40만 명이 되리라 추정한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직접적인 사과나 배상도 받지 못했다.
위안부는 한일 회담의 중요한 키워드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28일 한·일장관회담의 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타결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회담 속에서는 피해자는 ‘배제’되고,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수식어만이 남았다. 재단 설립과 10억 엔으로 무마하려 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받기를 염원하는 마음이 담긴 소녀상 철거도 언급했다.
국가가 피해자들을 외면한 사이 시민들이 나섰다. 부대신문은 지난 1516호에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지키는 대학생들을 만났다. 이번 호에서는 우리 학교 총학생회의 소녀상 설립을 위한 모금활동을 다뤘다. 위안부에 대해 다룬 영화 <귀향> 역시 많은 이들의 후원과 관심으로 개봉됐다. 정부가 아닌 개인들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해 만들어낸 결과였다.
위안부라는 표현이 가해자 중심적이고 용어 자체가 본질을 흐릴 위험이 있지만, 이 용어를 쓰는 것은 개인 차원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의 폭력이었고, ‘일본이 제도화했던 당대의 사회 분위기를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를 결자해지해야 할 측은 폭력을 행사했던 국가에 있다. 지난해 한·일장관회담에서 우리 정부는 피해자들이 원치 않는 ‘합의’를 해 또다시 이들에게 상처를 줬다. ‘불가역적이고 최종적인 합의’ 때문인지,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지난 2일에 열린 유엔인권이사회 고위급 회기 연설에서 위안부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평화란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이뤄진 상태다.” 이는 여성가족부의 <일본군 위안부 교육 교재>의 마지막 장에 실린 프란체스코 교황의 말이다. 정부의 허울 좋은 평화와 화해는 ‘공부가 하고 싶어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는’ 이유로 속아서 끌려갔던 피해자들의 간절한 바람과 한(恨)을 배반하는 처사다. 위안부 피해자가 말하는 정의는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이다. 이 두 가지가 갖춰지지 않은 채 한일 협력과 양국의 평화만 논하는 것은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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