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드 헤인즈 감독의 <캐롤>을 보기 전에 이 영화를 둘러싼 어떤 논란(특이한 것은 영화에 대한 논란이라기보다는 평론가의 해설에 대한 논란이다)을 먼저 접했다. 꽤나 논쟁적인 대목이 있나보다 했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의아해졌다. 논란은 영화 속에 뚜렷이 기입된 무언가를 지우거나 희석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남성 짝패가 등장하는 마초 버디영화에서도 동성애 코드를 읽어내는 게 영화비평이다. 두 여성 간의 멜로드라마에서 ‘여성’은 지우고 ‘사랑’에 방점을 둔 그 글들은 내게 무척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네티즌들의 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퀴어 영화라기보다 ‘그냥 사랑’ 이야기라는 것이다. 

  퀴어 로맨스라는 특수성을 사랑이라는 좀더 보편적인 가치 안에 포섭하면 우선 두 가지가 희석된다. 하나는 성소수자의 사랑을 지켜봐야 하는 이성애자 관객들의 불편함이 희석되고, 다른 하나는 이 영화가 지닌 특별한 매혹과 특수한 맥락이 희석된다. 전자는 어쩌면 관객 개인 차원의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후자는 좀더 중대한 차원의 문제를 야기한다. 그건 울타리 밖에서 선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매혹의 영화를 시체처럼 창백하게 표백시켜 쾌적한 감옥으로 되돌려 보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토드 헤인즈의 말을 내게 상기시키고 싶을 듯하다. 칸영화제 기자회견장에서 그는 <캐롤>을 (두 ‘여성’ 대신)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로 보아주기를 요청하였다. 원작자, 각본가, 제작자, 감독 모두 동성애자라는 점을 관객들이 지나치게 의식할 것을 염려한 탓일까. 일단 그의 발언에 담긴 함의를 헤아려 보자면, 우선은 퀴어영화라는 규정으로 주류 관객들을 밀어낼(혹은 겁먹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또 다른 차원에서는 <캐롤>이 정치적 액티비즘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비판적인 영화는 아니라는 의미인 것 같다. 후자에 관해서 좀더 얘기해보기로 하자. 
  확실히 <캐롤>은 레즈비언 커플이 사회적 장벽에 맞서는 투쟁기가 아니라 그들 내면에 피어난 감정의 드라마에 몰두한다. 그 감정이란 물론 성별, 나이, 인종을 초월하여 보편적 가치를 지닌 사랑이겠다. 그래서 (불편하고 특수한) 레즈비언은 지우고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멜로에 초점을 두는 것이겠지만, 그럴 경우 우리는 영화에서 본 많은 것들을 못 본 척해야 한다. 
  1950년대의 미국. 동성애 소설이 ‘외설출판물’로 분류되던 시절, 원작자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반자전적 소설을 ‘가명’으로 발표했다. <캐롤>의 두 여성도 그 시절을 살고 있다. 동성애가 병리학적 질병으로 치부되던 시기에 그녀들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스스로 승인해야 하는 사적이며 내밀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그리하여 결말에서 자살이나 우울증으로 마감되는 퀴어 로맨스의 전형을 벗어나 캐롤과 테레즈가 서로를 마주할 때 이 영화는 이성애 멜로의 해피앤딩을 넘어서는 기묘한 감동이 생겨난다. 이를테면 그 앞 장면에서, 캐롤이 공동양육권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도 진정한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 ‘나를 부정하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이건 ‘그냥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캐롤>은 감정의 드라마면서 시선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캐롤과 테레즈의 로맨스는 시선을 통해 시작되고 시선으로 완성된다. 역사적으로 퀴어 로맨스에서 응시의 매혹은 검열을 피하기 위한 성적 재현의 전형적 수사로 활용되어 왔다. 이성애자의 시선으로 보더라도, 이 영화의 퀴어적 응시에서 이성애 로맨스를 넘어서는 잉여의 정서를 감지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굳이 눈 감으려는 생각만 없다면.   
  동성혼이 법제화되어 있고 대통령이 동성애자 잡지의 표지모델로 나서는 오늘날의 미국과 야당 의원이 나서서 ‘자연과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동성애를 누가 찬성하겠냐’고 공언하는 2016년의 한국에서, <캐롤>은 서로 다르게 읽힐 수밖에 없다. 동성애를 지우고 사랑만 보려는 시선에 뭔가 수상쩍은 혐의를 두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이 ‘퀴어’영화를 좀 더 정면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강소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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