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거가 끝나고 강의실로 발길을 떼면서 나도 모르게 긴장을 했다. 나 아닌 다른 사람과 만난다는 것은 많은 준비와 다져진 호흡이 필요한데, 저들은 다수요 나는 혼자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문을 열고 강단에 서자 수십 개의 눈동자가 나의 입과 손짓, 시선에 꽂혔다. 이 순간이야말로 최고의 집중도가 발휘되는 찰나다.(‘이 찰나’가 강좌의 성패를 결정한다.) 문득 나는 낯선 사람들 앞에 벌거벗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흡사 겨우내 잎이 진 채로 살아온 나목(裸木)처럼.
  나무들은 중춘부터 만추까지 붉거나 푸른 잎으로 자신을 두른다. 그것으로 자신의 상처나 빈곤을 감추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나목들은 겨울동안 맨몸을 그대로 노출했었고, 이제 봄을 바라보면서도 아직은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수줍게 꽃을 피운 매화나 늘 떳떳한 상록수를 제외하면, 나목들은 그냥 ‘나뭇가지’였다.
  강단에 선 나 역시 그러했다. 그나마 낯익은 아이들의 미소가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나는 마음이 들킬세라 얼른 강의계획서를 읽어 내려갔다. 해마다 학기마다 반복되는 일이건만 오늘따라 왜 이리도 서툴고 떨리는지!학생들은 잘 모르리라, 교수들은 ‘~척’하는 데 수준급의 배우라는 사실을.
  학교는 제법 숲이 울창하다. 데크가 깔린 미리내길 안쪽으로 우거진 나무들을 보면 마음조차 느긋해진다. 게다가 숲이 뿜어내는 생기는 나를 홀가분하게 만들어 준다. 사실 미리내는 우리 학교의 허파였다. 다행히도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그 언저리에 있어서 늘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오후가 되면 창을 열고 미리내를 한껏 가슴에 품는 게 하나의 낙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숲을 누리고 있음에도 ‘나목되기’에 서툰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갑자기 그 마음 한 자락에 웅크리고 있는 상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나 제 속을 사이다처럼 비워내진 못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드러내지 못한 속내는 까르마가 되어 무의식에 쌓여 상처로 남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단은 나에게 많은 의미가 있다.
  강단은 내 모든 것을 드러내는 ‘나목되기’를 강요한다. 더러 밑천까지 쏟아내도 본전조차 건지지 못하는 가혹한(?) 공간이기도 하다. 한번이라도 강단에 서 본 사람은 알고 있다. 그 자리에 서는 것이 얼마나 떨리는 일인지. 혹여 나를 백안(白眼)으로 바라보면 어쩌나, 나의 헛말을 눈치 챈 것은 아닐까. 특히 내가 잘 모르면서 가르치고 있음을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학(學)’이란 선생의 모든 것을 그대로 본뜨는 데서 비롯한다. 학생이 선생의 말투, 글투를 닮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더러 선생의 감정, 곡해, 아집마저 배우는 학생도 있다. 이게 강단에서 나목되기 쉽지 않은 이유이다. 나목은 나의 말투, 글투는 물론이요 감정, 논리, 아픔, 질투, 인내까지도 곧바로 드러낸다. 그런데 나목이 되는 순간, 놀랍게도 정신이 맑아지고 개운해진다.
  오늘 강단을 내려와 강의실 문을 나서는 순간 아이들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다소 들뜬 기운이 나를 휘감았다. 첫날이라 일찍 파한 데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이번 학기는 나목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정직하고 진지하며 인간다운 나무가.

 

김승룡(한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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