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먼지 덮인 파일 하나를 발견했다. 띠지엔 ‘사회부 참고 자료’라고 적혀 있었고 별 생각 없이 몇 장 넘겨봤다. 그러다 한 페이지에서 오래 시선이 머물었다. 덥수룩한 장발의 사내 사진. 그 밑에는 그의 약력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1887년 3월, 창문에 기대 잠들었을까, 아니면 집에 계신 어머니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민머리에 군모를 뒤집어 쓴 스물두 살 청년이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태운 버스가 다른 승객을 태우고 내리기를 몇 번 반복했다. 그러다 번뜩 정신이 든 청년은 창문 밖을 보고서 급히 버스를 멈춰 세웠다. 가까스로 내릴 정류장을 놓치지 않은 것까지는 다행이었다. 그러나 떠나는 버스가 내뿜는 매연이 사라지고 시야가 선명해지자 그의 정신도 깨어났다. 그제서야, 그는 가방을 놓고 내렸다는 것이 떠올랐다.
놓고 내린 가방 안에는 금서로 지정된 사회과학 도서와 그가 몸담고 있던 학생운동 조직에 관한 문건들이 들어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군복만큼이나 그의 신분을 뚜렷이 노출시키는 물건들이었다. 며칠을 앓다시피 했을 것이다. 가방은 그를 되찾아 오지 않았고 그의 삶도 제자리로 되돌아 올 수 없었다. 결국 그의 가방이 보안대(전두환 정권 때 존재했던 국가기밀자재를 보호하고 간첩업무를 수행했던 군대조직)로 들어갔다. 그는 인근 야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우리 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재학 중이었던 故 장재완 열사다. 간단한 약력을 바탕으로 떠올려 본 그의 마지막 생애가 아득하게 다가왔다. 헐떡이는 숨으로 야산을 오르며 했을 생각과 두려움, 비명도 생각했다. 그가 떠난 해로부터 29년이 지난 지금, 또 한명의 그가 나타나지 않을까 두렵다. 임시국회 본회의에서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안에 대한 수정안(이하 테러방지법)>이 직권상정됐기 때문이다.
테러방지법에서 정하는 테러의 범위는 모호하며 포괄적이다. ‘테러위험 인물’의 정의는 테러를 범했던 사람이 아니라 범할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이다. 조사 대상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람 모두가 될 수 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이 법안의 효력이 다른 법률보다 우선 적용된다는 것. 진정으로 테러를 막기 위한 법안이라면 좀 더 명확히 정의와 대상을 특정해야 할 것이다. 해당 법안이 통과된다면 테러가 아닌, 국민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강화되고, 표현의 자유가 구겨진다. 자신을 꼭꼭 숨기기 위해 가방을 함부로 열 수 없는 곳이 된다. 아니, 가방을 열지 않아도 국정원은 가방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故 장재완 열사의 가방 속에서 응어리져 있는, 1987년의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2016년 현재는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나. 적어도 제2의 故 장재완 열사는 나와선 안 된다. 하는 그의 유서 중 일부다. ‘부모님 이제 저는 가야할 때가 왔습니다. 적들의 야수 같은 손길이 나를 찾고 있습니다. 본인의 중대한 과오로 인해 조직을 보위하고자, 나의 육체적 생명을 단절합니다. 떠나는 불효자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아픔을 느낍니다. 재열아 재포야 가는 형이 밉지. 그래도 난 가야해. 형의 죽음의 의미를 하루빨리 깨우치길 바래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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