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시스는 공포와 연민에서 비롯되는 쾌감이다. 비극적인 드라마를 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감정의 정화 혹은 배설작용을 ‘카타르시스(catharsis)’라고 정의했다. 이천몇백 년이 흘렀지만 이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드라마 같은 현실 때문이다. 현실은 ‘공포’와 ‘연민’을 동반한다. ‘나도 저렇게 되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과 ‘내가 저런 상황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은 비극적 현실에 대한 일반적 반응이다. 이 두 감정 사이에서 사람들은 길을 잃는다.

  카타르시스가 가능한 것은 동일시 효과 때문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감정이 이입되고 완전히 몰입하는 순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 극 중 인물과 유사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거나 공감대가 형성되는 순간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유럽발 IS 테러소식은 공포와 연민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남의 나라 일이니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언제든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마라고 생각했던 모든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국정 교과서를 보라. 정치권력과 기득권 세력, 보수 언론의 한판 밀어붙이기는 여론도 국민도 미래도 국제사회의 시선도 괘념치 않는다. 코미디 같은 현실은 공포와 연민을 자아낸다. 객관적 사실(fact)과 역사적 진실(truth)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은 사실상 검인정 제도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정교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지시한다. 출판사만 다를 뿐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만일 집필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교육부는 교과서를 ‘불합격’시킬 권한을 가지고 있다. 각 출판사는 막대한 시간과 돈을 들여 준비하고 심사에서 ‘합격’ 하기 위해 교육부의 집필기준을 충실히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통과시킨 8종의 역사교과서를 비난하는 것은 정부의 자기 부정이 아닌가. 세금을 들여 공익광고를 제작하고 국정교과서의 필요성을 홍보하는 현실은 충분히 희극적이지만 공포와 연민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평범한 생활인 김성칠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전쟁의 한복판을 통과한다. 매일매일 긴박했던 순간을 적은 김성칠의 일기가 먼 훗날 아들 김기협에 의해 공개된다.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김성칠은 이념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소시민의 시선으로 전쟁의 비극성과 일상의 불안을 실감 나게 묘사했을 뿐이다. 그 일기가 바로 <역사 앞에서>이다. 역사를 전공한 김성칠에게 한국전쟁은 비극적 드라마가 아니라 비참한 현실이 되었다. 전쟁 중에 사망한 그의 짧은 삶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일기 곳곳에는 서울대학교 교수 사회의 변화와 술렁거림, 일상생활의 고통과 전쟁의 두려움, 지식인의 고뇌와 현실에 대한 통찰이 잘 드러난다. 어떤 전후 문학 작품보다도 당대 현실을 잘 들여다볼 수 있는 글이다.  
  수학 정석에 사칙연산을 설명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8종 교과서 중 2종 교과서에 유관순이 나오지 않는다는 교육부의 홍보 동영상은 희극이다. 임기 동안 역사를 바꾼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일까. 국민의 혼을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 믿음은 절대적인 지지 속에 당선된 히틀러도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은 언제나 옳다고 믿는 대통령은 오늘도 정치인과 국민들을 ‘평가’하기 바쁘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거울이다. 역사 서술 대상의 선택, 객관적 사실에 대한 기록, 원인과 결과에 대한 해석, 후손들의 다양한 평가 등이 얽혀 서로 다른 관점이 충돌할 때 역사는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는 알렉시스 토크빌의 말은 두고두고 생각해 봐도 언제나 옳다. 정치는 국민 모두의 하루를 날마다 새롭게 한다. 대통령과 교육부의 앞면만 있는 동전 만들기는 성공할 수 있을까. 나만 옳고 너는 틀리다는 신념이 이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이다. 이 비극적 현실에 카타르시스는 없다.
 류대성 작가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