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박유현)
‘어려서부터 평소의 야망은 오로지 ‘불후의 문장’에 있었으매, 시인·비평가·사상인이 될지언정 ‘학자’가 되리란 생각은 별로 없었다’
자신의 글을 쓰고, 다른 사람의 글을 비평하던 문장가. 하지만, 어느 날 그는 자신의 길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린다. ‘학자’가 되리라는 생각을 전혀 못한 문학계의 기린아가 한국인의 말과 글의 연원을 담고 있는 고대의 시가에 빠져버려 ‘학자’로 거듭난 것이다. 그가 바로 문학비평가이자 국문학자 또는 시인, 그리고 자칭 ‘국보 1호’로 널리 알려져 있는 양주동이다.
양주동은 1903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사서삼경을 줄줄 외웠다는 그는 신식학교를 다니기도 했지만, 주로 가학(家學)을 통해 고향에서 한학을 익혔다. 그는 평생 한문 번역투의 문장을 사용했는데, 이에 대해 <한자 문제>에서 ‘어려서 한학 공부를 했기 때문에 한자어를 남보다 더 많이 쓰는 버릇이 있다’고 술회했다.
1920년대 일제 문화통치기의 양주동은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로 이름을 떨쳤다. 1923년 시 동인지 <금성>을 발간했고, 1927년에는 동아일보에 ‘<해외문학>을 읽고’를 기고했다. 당시 도쿄 유학생들에 의해 발행되던 <해외문학>은 일본어를 거친 중역이 아닌 원문을 통한 직접 번역이라는 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양주동은 <해외문학>에 대해 문어체의 고집이나 축차적 직역을 고집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내용의 평을 발표했다. 이에 <해외문학>의 기고자들이 반발하며 번역 논쟁이 초래됐고, 양주동은 문학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양주동의 제자인 김시태(한양대 국어교육) 명예교수는 “근대 문학비평의 선구자인 이폴리트 테느의 문학이론을 비평에 적용한 최초의 한국인이 양주동”이라며 “자타가 공인하는 당시 문학비평계의 선구자였다”고 전했다.
1928년 숭실전문학교의 영문학 교수로 부임한 그는 얼마 안 가 일생일대의 학문적 전환을 맞게 된다. 1929년 경성제국대학의 교수였던 오구라 신페이가 <향가 및 이두의 연구>라는 책을 발표해 <삼국유사>와 <균여전>에 있는 25수의 향가의 해독을 시도한 것이다. 이에 일본인에게 우리말과 글의 연원을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한 양주동은 당대 최고의 문학비평가에서 국문학자로 변신한다. 그는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연구에 몰입했고, 1937년 <향가의 해독-특히 ‘원왕생가’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해 오구라 신페이의 향가 해독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어 1942년에는 <조선고가연구>라는 신라 향가에 대한 해독·주석서를 발표하여 세간의 파란을 일으켰다. 임주탁(국어교육) 교수는 “<조선고가연구>는 오구라 신페이에 주도됐던 당시의 향가 연구를 한 차원 넘어선 것”이라며 “이후 이 책은 향가연구자가 가장 먼저 봐야할 기본서가 됐다”고 밝혔다.  
이처럼 향가 연구를 통해 국내의 문화적 독립 투쟁을 이끌었던 양주동은 광복 이후에도 고려가요를 역주한 <여요전주>를 발표하며 활발한 학술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는 동아방송의 ‘유쾌한 응접실’이라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대중적 지식인으로도 거듭났고, 향가연구나 문학비평뿐 아니라 수필가로서도 역량을 발휘했다. 그의 작품 중에는 글과 술로 풀어낸 자신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라는 뜻의 <문주반생기>나 <인생잡기>와 같은 수필이 유명하다.  
 

<문주반생기> 양주동 저/1994/범우사
이 책은 양주동의 자전적 수필집이다. 저자는 ‘시·문과 술을 중심으로 하여 보잘 것 없는 나의 반생의 기록을 숫제 써 보려 했다‘고 저술 동기를 밝혔다. △유년기 △술 △청춘백서 △여정초 △학창기 △교단 10년의 6부로 구성돼 있으며, 총 95편의 수필이 담겨있다.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