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1. 오랜만에 제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늘 웃고 농담 잘하는 친구인데 갑자기 학교생활이 그립다며 울먹였다. 지방의 콘텐츠 회사가 대개 그렇듯 야근과 박봉에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다. 사회 초년병이 다 비슷하니 참고 견뎌 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친구도 나도 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알맹이는 모두 서울에 있고 변방은 늘 춥고 배고프다. 게다가 눈치없는 일부 지역의 CEO들은 ‘요즘 애들 근성이 없다’, ‘자세가 안 돼 있다’며 타박이나 하고 있다. 견디다 못한 직원들은 점점 선배들처럼 서울로 짐을 싸서 떠나고 있다.
풍경 2. 지방자치단체에서 대형 콘텐츠 사업이 있다기에 회의를 갔다. 취지는 매우 좋았다. 대학, 지방자치단체, 문화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동네에 문화산업 기지를 만들어 보라는 것. 투자액도 상당했다. 그런데 사업 내용이 이상했다. 한마디로 예산은 백 퍼센트 건물 짓는 데만 쓰고 몇 년간 참여자들은 ‘열정페이’로 일하라는 것이다. 이걸 지적했더니 주변에선 지역사회에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눈길을 보낸다. 똑같이 세금 내는 부산시민인데 교수, 일선 공무원, 문화기획자들의 아이디어와 시간은 봉사이고 건설 토목회사에게는 반드시 챙겨줘야 하는 불문율이라도 있단 말인가.
학과 사무실로 가끔 재능기부 해달라고 연락이 온다. 정말 어렵고 필요한 시설이거나 우리가 감당할 일이 아닌 이상 정중히 거절한다. 속내는 저렴한 돈을 투자해 청춘들의 노동력을 빌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당연하게 사람의 지식과 아이디어를 무상으로 여긴다.
기관들은 한술 더 떠 서울에서 내려오는 대기업에게 공간과 예산을 듬뿍 안겨준다. 겉으로만 보면 나쁠 게 전혀 없다. 이른바 기업유치와 기관들의 실적이 공생하는 장려할 만한 정책이다. 문제는 부산의 작가들이, 교수들이 똑같은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부산의 미래성장 동력 기반을 좀 만들자고 할 때는 공간 한 평, 예산 없다고 외면하던 기관들이 이런 식으로 일을 한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는 것은 공간도 남고 마땅히 할 일도 변변찮은 그 회사들이 오히려 내게 사람과 프로그램을 채워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그럴 리는 하늘 땅 별 땅 없겠으나 내가 시장이라면 바다를 메워 카지노를 세울 게 아니라 부산에 실존(?)한다는 박사 1만 명에게 지역성장을 위한 과제 연구비로 100만 원씩을 주겠다. 1만여 개의 아이디어와 정책개발이라니, 10년 동안 부산에서 이리저리 활용해도 넘칠 듯하다. 막상 그 예산 집행해 본들 영화의 전당 공사비 1/16도 안 된다. 또 내가 구청장이라면 쓸데없는 관내 토목사업 한두 개 정리하고 대신 지역의 창의적인 젊은이들에게 힘내서 일해 보라고 밥과 돈을 주겠다.
외계인의 침공에 맞서야 할 태권브이를 만들려면 김박사 같은 과학자들을 데리고 와야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대형로봇이 들어갈 격납고 공사라니, 지구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다.

 윤기헌(디자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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