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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회 부대문학상 소설 부문 가작] 구두
  • 김진호(토목공학 07)
  • 승인 2015.11.23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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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걸을 때마다 대리석 바닥이 구두 뒷굽을 잡아당기는 묘한 인력을 느꼈다. 기차표를 끊고 돌아서자 빈속에 명치께가 찌르르 울렸다. 그제야 오늘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것이 생각났다. 급한 대로 근처의 푸드코너로 향했다. 그곳에는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이미 북적거리고 있었다.
K는 문득 일식 초밥이 먹고 싶어 그리로 향하다 유리문 앞에서 우뚝 멈춰 서야만 했다. 자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모두 다 짝을 이루고 앉아있어서 괜히 그 안에 끼어서 혼자 무언가를 먹기가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돌아서서 나오는 K의 눈에 문득 길게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음식점의 줄인듯했는데 줄은 턱없이 길어서 도무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밥을 먹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다지 만족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줄 서서 먹는 집은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일단 줄을 섰다. 도대체 무슨 음식을 하는 가게인지 알 수 없었다. K는 용기를 쥐어짜서 앞사람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저기…… 실례합니다만…… 여기 뭐 파는 가게입니까?”
중년의 사내는 대뜸 미간을 확 찌푸리면서 K의 아래위를 훑었다.
“나도 몰라요! 거참 더우니까 말 좀 시키지 마쇼!”
다짜고짜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는 사내가 야속할 법도 했지만, 어쩐 일인지 K의 입에서는 죄송하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길 건너편에 있는 작은 국밥집에 들어갈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K는 이내 고개를 털었다. 그 가게에 사람이 없던 점도 걸렸고, 이미 그의 뒤로 서 있는 사람들이 꽤 생겼다는 사실이 발걸음을 돌릴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K는 30분 정도를 기다리고 나서야 테이블에 겨우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앉으니 후회가 밀려들었다. 없는 게 없다 싶을 정도로 메뉴는 다양했지만, 막상 먹을 만한 메뉴는 없는 그저 그런 가게였기 때문이다. 일단은 간단하게 우동과 김밥을 시키기로 했다. 종업원은 K의 눈도 마주치지 않고 간단히 주문만 확인하더니, 휙 하고 등을 돌려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과연 예상대로였다. 김밥 안에 있는 시금치는 숨이 너무 죽어서 흐물흐물했고 밥은 꼬들꼬들하다 못해 딱딱했다. 맑디맑은 우동 국물에 둥둥 떠다니는 면발을 건져내면 그릇에 밑바닥에 깔린 조미료 가루들이 육수 안에서 먼지처럼 소용돌이쳤다가 다시 내리깔렸다. 가게를 나오던 사람들의 표정이 알만도 했다. 어찌어찌 꾸역꾸역 식사를 마쳤다. 나올 때 보니, 어째 입구에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수는 줄지를 않았다. 외려 더 늘어난 듯 보였다. 서 있는 사람들이나 앉아 있는 사람들이나, 표정에는 짜증이 그득했다.

승차장의 출입구로 향하면서 시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직 시간은 넉넉했지만, 승차장에 내려와서 담배라도 한 대 태울 겸 일찍이 내려왔다. K는 오늘따라 다리의 피로감이 상당한 것을 느꼈다. 벤치에 앉아서 다리를 조금 주물렀다. 종아리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종아리뿐만이 아니었다. 구두에 뒤꿈치가 쓸렸던 탓인지 붉게 부어있었다. 번쩍번쩍 빛이 나는 그럴듯한 구두였지만 K의 입장에서는 뻣뻣했고 늘 불편했다.
승차장엔 누가 봐도 여행객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학생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저마다 기대에 부푼 얼굴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 K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여행해본 게 언제였나 떠올려보았다. 아마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쯤이었을까…… 따르르릉. 흐릿한 기억들을 쫓아내기라도 하듯 안내음이 승차장에 울려 퍼졌다. 후덥지근한 바람을 몰고 오며 마침내 기차가 역에 들어왔다.

비교적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유리 너머로 보이는 기차의 좌석은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기차에 올라서자 화장실과 개수대가 있는 통로가 보였다. 통로 한쪽에 앳된 얼굴의 아이 두셋이 쭈그리고 앉아서 저희끼리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아이들의 커다란 짐이 지나다니는 길목을 막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K가 지나려고 눈치를 주자 한 아이가 마지못해 옆에 둔 짐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이는 되려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객실 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위라도 하듯이 등 뒤에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사람들이 저마다 얽히고설켜서 시장바닥이 따로 없었다. 그들을 뚫고 지나가기 위해 K는 실례합니다, 를 입으로 주문처럼 수없이 되뇌어야 했다. 손바닥 반 만한 표 아래 쓰여있는 암호 같은 좌석 번호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어떻게 표의 자리와 일치하는 자리를 겨우 찾았나 싶었는데, 웬걸, 남자 하나가 앉아있었다. 남자는 도대체 뭐가 그리 많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큰 배낭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선 K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실례합니다만, 그쪽 자리가 맞으시나요?”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K를 쳐다보더니 느닷없이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그 큰 배낭을 번쩍 들어 끌어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K를 지나쳐 곧장 뒤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남자가 난 좌석의 가운데 시트 부분이 푹 꺼져있었다. 자리에 앉자 남자의 후덥지근하고 축축한 체온이 온전히 느껴졌다. K는 괜히 부아가 치밀어 올라서 뒤돌아 걸어가는 남자를 소심하게나마 흘겼다. 남자는 K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갔다.

K는 서류뭉치가 든 가방을 내려놓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에 비친 그의 모습은 처참했다. 아침에 바른 왁스는 온통 엉겨 붙어있었고, 벌써 까슬하게 올라온 턱 주변의 수염은 지저분해 보였으며, 퀭한 두 눈 밑으로 다크써클이 내려와 광대뼈에 겨우 걸려있었다. 웬 늙수그레한 남자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K를 마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객실 안에 익숙한 방송이 흘러나왔다. 기차가 출발한다는 방송이었다. 마침내 창문에 비친 그의 얼굴로 기다란 가로등이 천천히 다가왔다. 이윽고 어둠이 내린 바깥풍경이 서서히 뒤로 밀리는가 싶더니 또 다른 거뭇한 장면을 끌어와 또 뒤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이는 희미한 불빛이 짙게 깔린 어둠을 가로로 길게 찢으며 뒤로 빨려 들어갔다.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은 점점 빨라지더니 창밖은 어느새 온통 검게 물들었다. 가끔 희끗희끗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지만, K는 그게 어떤 것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K는 휴대전화를 열어 1번을 꾹 눌렀다.

-여보세요. 예 저예요. 네? 아니요. 이제 끝나고 올라가는 길에요. 아니 그냥 그렇죠, 뭐. 아버지는요? 이해하세요.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니 편해요. 아니에요. 다 뭐 이렇잖아요. 크게 힘들지도 않아요. 네네. 일단 생각만 하고 있어요. 뭐… 아직은 그래요. 네… 밥 잘 챙겨 드시죠? 아니 안 보내줘도 돼요. 남았어, 아직. 에이, 보내준 지가 언젠데. 안 아껴요. 펑펑 쓰는데 뭘. 좋은 거 좀 많이 드시고요. 네… 잘 먹을게요. 제가 뭐 애예요. 참.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네네. 내려갈 때 연락 드릴게요. 네, 끊어요.

종료버튼을 누르자 종아리부터 엉덩이를 타고 전신으로 노곤함이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이 느꼈다. 졸음이 수르르 밀려왔다. 그렇게 K는 꾸뻑꾸뻑 졸다 깨기를 반복했다. 얼마 못 가 입안이 깔깔해서 잠에서 깼다. 누군가 바짝 말린 모래를 한 움큼 털어 넣은 듯 입안이 뻑뻑했다. 가방을 열어 서류 뭉텅이를 헤집자 생수통 하나가 손에 집혔다. 생수통은 비어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객실의 부산스러운 분위기는 어느새 착 가라앉아있었다. 이따금 낮게 코를 고는 소리나 소리를 낮춰 조곤조곤 저희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통로에 앉아서 떠들던 아이들도 저마다 벽 하나를 차지하고 머리를 기대고 휴대전화만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K는 대충 입안을 헹구고 물을 한 병 떠서 돌아왔다.
자리에 돌아와서 앉자 구두를 신고 있었던 발목 언저리가 뻐근했다. 퉁퉁 부어 비명을 지르는 발뒤꿈치를 조금 빼내어 보니 뒤꿈치의 살이 벗겨져서 그 자리가 발갛게 패어있다. 자신의 발에 딱 맞게 늘어날 것이라고 했던 구두는 도무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득 K가 고개를 돌렸을 때 아까 그 남자가 통로 하나를 건너 옆 좌석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K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시선은 K의 발 쪽을 향하고 있었다. 남자의 시선에 K는 자신이 못할 짓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다시 구두에 발을 밀어 넣었다. 부은 발을 다시 구두로 넣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억지로 구겨 넣은 발이 구두 속에서 아우성을 쳤다. 남자의 시선은 노골적이다 싶을 만큼 K를 향해 있었다. K는 그의 시선을 무시하려 애쓰는 한편, 세워둔 서류가방과 짐을 발로 더듬어 창가 쪽으로 밀었다.
기차는 까마득한 어둠 속을 잘도 헤치고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안내방송을 듣자 하니, 아직 한참을 더 기차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K는 다시 몸이 노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남자가 신경 쓰이는지 졸다가도 흠칫, 깨서 자주 옆을 살폈다. 까딱까딱 꺾이는 고개에 힘을 주려 안간힘을 쓰다가도 어느새 다시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몇 개의 역을 지나고 문득 잠에서 깨었을 때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남자가 보이지 않자 K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꼬리뼈를 앞으로 쭉 밀어 시트에 몸을 깊게 묻었다. K는 발이 너무 아파서 구두를 벗어 두기로 했다. 벗어둔 구두를 벽 쪽으로 대충 밀어붙이고 발을 객실 바닥에 댔다. 한결 흐물흐물해진 발끝에서부터 졸음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K의 몸 전체가 좌석의 시트쿠션 속으로 한도 끝도 없이 파고들었다.

K는 그렇게 한동안 꽤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거의 드러누워 있었던 자신의 자세를 발견하고 스스로도 민망할 정도였다. 어느새 비어있던 옆 좌석에는 남자 승객이 앉아 있었다. 급한 대로 창문을 보고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리했다. 바로 고쳐 앉으니 요의가 밀려들어 아랫배가 찌릿찌릿했다. K는 몸도 잠시 일으킬 겸 싶어 구두를 찾아 발을 더듬었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맨발로 객실 바닥을 휘휘 저어보았으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서류가방은 그대로 있었지만, 벗어놓은 구두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거기에 있어야 하는 데 없었다. 다리 사이로 고개를 밀어 넣고 좌석 아래를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K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쭈그리고 내려앉았다. 옆에 있는 남자 승객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어두운 좌석 밑은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K는 조심스레 좌석 밑으로 손을 넣어보았다. 손가락 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천천히 더듬었다. 작은 티끌 같은 모래나 뭉쳐진 먼지 같은 것들이 만져졌다. 툭. 묵직한 무언가가 손에 닿았다가 안쪽으로 밀려들어 갔다. 휴대전화의 불빛을 밝혀서 비추어 보았다. 구석에 붙어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구두는 아닌 것 같았다. 얼굴에 피가 몰려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K가 고개를 들자 옆 좌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K는 이마에 배여 나오는 땀을 훔치며 남자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제 신발 못 보셨나요? 그, 저……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아니, 저, 그러니까…… 제가요 벗고 있었거든요.”
K의 목소리는 어째 점점 기어들어갔다.
“네?”
남자는 귀찮음과 경계 사이의 어딘가쯤이나 되는 눈빛을 하고선 K를 쳐다보았다. K는 최대한 공손해 보이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그러니까, 제가 원래 신고 있었는데요. 벗었거든요…… 분명 벗어서…… 놔뒀거든요. 저기에.”
남자는 내가 손으로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이내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K는 좌석에 앉은 채로 홀로 기억을 곱씹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도저히 찾아도 나오지 않는 리모컨 따위를 찾으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냉장고를 열어보는 것처럼 뭐라도 나올까 서류가방을 뒤적여 보았다. 리모컨이 냉장고에서 나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냉장고를 열어보는 행동과 구두가 들어있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서류가방을 뒤적이는 행동은 어쩐지 사람을 애잔하게 보이게 하는 측면에서는 닮아있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그곳에 구두는 없었다. 비싼 구두도 아니고, 그저 입사 기념으로 선물 받은 5만 원짜리 상품권에 돈을 조금 보태서 산 구두였다. 어머니가 백화점에 들러 사주신 구두… 그리 뛰어나지도, 못나지도, 눈에 튀지도 않는 무난한 검은색의… 학교를 졸업하고 적당한 기간의 구직활동 기간을 거쳐 취직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을 것 같은 그런 디자인의 구두 말이다. 가죽은 아니었을 것이다. 금액으로 보아 아마 턱도 없었을 것이다. K는 선물 받고 나서도 딱히 크게 기뻐하지는 않았다. 그저 비로소 자신이 직장에 입사하는구나, 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 그런 구두였다. 아니, 세상에 어떤 미친 인간이 그런 구두를 훔쳐간단 말인가? 왜? 오묘한 패턴의 무늬가 그려진 기차 바닥이 눈에 띄었다. K는 생각할수록 눈앞이 핑핑 도는 것만 같았다. 수백 번 복기해도 전혀 알 수 없는,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바둑판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구원의 손길은 의외의 곳에서 뻗쳐왔다. 객실의 문이 조심스레 열리더니 워키토키를 한 손에 쥐고 감색 정장을 입은 남자 승무원 하나가 들어왔다. K는 손을 들어 그에게 다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승무원은 K의 손짓에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예,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승무원이 깍듯하게 허리를 굽히며 K에게 물었다. K는 주변을 의식해서인지 한 손을 오므려 입 옆에 두고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다.
“구두가 없어졌어요……”
“네?”
승무원은 K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아니, 그러니까…… 제가 구두를 벗어놨는데 사라졌어요……”
“네? 그러니까 구두가 없어지셨다고요? 아니, 그게 왜? 잘 신고 있던 구두가 왜 없어지는 건가요?”
겨우 털어놓은 비밀을 부러 까발리는 듯한 승무원의 큰 목소리에 괜스레 K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니요, 제가 잠시 발이 아파서 벗어놨거든요…… 늘어난다고 했는데…… 안 늘어나고 적응도 안 되고… 뒤꿈치에서 피가 나고…… 아니, 아니다, 그러니까 잠깐 잠들었는데…… 분명히 제가 저쪽에 가지런히, 아니, 그러니까 사실은 대충 벗어서 이쪽 밑에…”
옆 좌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자신의 시트를 뒤로 조금 젖혔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승무원은 남자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K에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주무시려고 구두를 벗어두셨는데 일어나보니까 없어지셨단 말이죠?”
“네네……”
“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승무원은 어딘가로 향하더니 손전등 하나를 가지고 와서 객실을 돌아다니며 좌석과 시트 아래를 비추기 시작했다.
“죄송하지만 발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네네, 죄송합니다. 금방 끝나니까요. 네. 저쪽 자리 승객께서 구두가 없어지셨다고 해서요.”
짜증 섞인 목소리가 객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잠에서 깬 승객 하나가 툴툴대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아이… 거참, 잠 다 깼네! 아니, 요즘 세상에 어떤 바보가 제 구두 하나도 제대로 간수 못 하는 거요!”
곧이어 역무원의 송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협조 부탁합니다.”
K는 그 정도까지는 안 하셔도, 라는 말이 혀뿌리까지 치솟는 걸 느꼈지만 꾹 참았다.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고개조차 들기 어려웠다. 승무원은 허리를 굽히고 시트 밑을 비추며 일일이 밑을 확인하고 있었다. 마치 손전등으로 K의 속옷을 들추고 그 안을 훤히 비추고 있는 듯한 참담한 느낌이었다. 고개를 숙여도 얼굴이 후끈후끈했다. 부은 뒤꿈치에 붙은 피딱지가 눈에 띄었다. 그깟 구두… 하지만 그깟 구두가 없으면 어디도 갈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K는 할 수 없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빨리 어딘가에서 구두가 다시 나타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시간은 아주 더디게 흘렀다.
이럴 때는 구두에 GPS라도 달려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휴대전화나 시계나 차 같은 귀중품도 아니고, 누가 신발 따위에 GPS를 달 생각을 할까? 또 어떤 멍청이가 신발이나 잃어버리고 다니는 사람을 위해 GPS를 신발에 달아줄까? 하지만 이 순간만큼 K는 지구 상에 어딘가 신발을 잃어 발이 묶여버린, 자신과 같은 처지의 누군가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동안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K가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물건들은 결코 그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K가 잃어버린 그 물건들은 손길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곳에 차곡차곡 쌓여서 거대한 산을 쌓았는지도 몰랐다. 아마 그 거대한 산엔 이제 구두 두 짝만큼의 무게 만큼이 더 실릴지도 모른다. 도무지 보이지 않는 그 구두 두 짝이 날아가 또각, 하고 어딘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선생님, 아무래도 여기 객실에 구두는 없는 것 같은데요. 죄송하지만 저희도 이런 경우는 거의 없어서요.”
승무원이 소매로 땀을 훔치며 말했다. 그도 난감해 하는 것 같았다. 그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툭 불거져있고 얼굴이 몹시 붉었다. 마치 제 일처럼 걱정해주는 그의 모습을 보니 K는 그저 눈물 나게 고마울 뿐이었다. 승무원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사실…… 기차 내에 작게 분실물을 모아두는 곳이 있긴 한데…… 제가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구두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
“선생님?”
“네! 네… 저… 그게, 검은색인데요.”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자신의 구두를 설명해야 할 일이 얼마나 있을까? 머뭇거리는 K의 모습을 보고 승무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허리를 굽혀 K의 안색을 살폈다.
“선생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번 K는 골똘히 구두에 대해서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골똘히 생각한다고 해도 별다른 대답이 나오기는 글렀다는 생각이었다. 그냥 구두인데, 내 구두인데 내가 보면 내 구두인 줄 아는데……
“저어… 그게 검은색에 그… 닦은 지는 얼마 안 돼서 아마 광택이 남아 있을 겁니다. 어… 그리고 어머니가… 사주셨어요. 입사기념으로 사주셨어요.”
“네?”
“아니, 그냥 보면 알 것 같은데요…”
“그럼 혹시 구두의 상표라던가, 뭐 특이한 무늬가 있다던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라던가, 뭐 그런 건 없나요?”
“에… 그게 제가 산 게 아니라서요. 저는 제 구두에 대해서 잘 몰라요.”
K는 얼굴에 피가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아니요, 그러니까 제가 알긴 아는데요, 말씀드렸다시피 어머니가 사오셔서요. 전화로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저… 전화라도 해볼까요?”
역무원은 여전히 당혹스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그러시군요, 솔직히 말해 조금 난감하네요… 이를 어쩐다… 그럼 분실물 모아두는 곳에 같이 가서 한 번 살펴보시겠습니까? 그곳에 구두가 있을 거라고 백 프로 장담은 못 드리지만, 한 번 살펴보면 혹시 또 모르니까요.”
“네네.”
K는 승무원의 호의에 다시 한 번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런데 저… 제가 지금 신을 게 없어서요.”
“아 참, 그렇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역무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들고 있던 워키토키 옆에 있는 버튼을 누르고 무어라 말했다.
“선생님? 잠시 앉아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돌아서서 걸어가는 그의 등에 대고 K는 또 한 번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했다. 조금 기다리자 역무원은 멋쩍은 표정과 함께 객실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파스텔 색조의 파란색 슬리퍼가 들려 있었는데, 발등 부분에 하얀색 줄이 가로로 세 줄 죽죽 그어져 있는 슬리퍼였다. 학교 앞에 있는 문구점을 지나면 처마 밑에 걸려있는, 하얀색 고무 실내화 틈바구니에 섞여 있어도 튀지 않는 그저 그런, 색을 잃은 흔하디흔한 그런 슬리퍼.
“죄송합니다. 신을 만한 게 이런 것밖에 없네요.”
송구스러워하는 역무원에게 K는 괜찮다고 말하고 슬리퍼를 받아 들었다. 뒤꿈치에 살짝 끝 부분이 걸릴 정도만큼 작았고 발등이 조금 끼었지만, 그럭저럭 신을만했다.
“그럼 이쪽으로.”
승무원이 손짓하고 먼저 앞서 걸어갔다. K는 뒤뚱거리는 어색한 걸음으로 승무원의 뒤를 따랐다. 분실물을 모아놓는 곳은 하필 기차의 끝쪽에 위치하는 듯했다. 몇 개의 객실을 지나는 동안 K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해야만 했다. 정장을 입고 파란색 삼선슬리퍼를 신고 역무원을 뒤를 총총거리며 따라다니는 그의 모습은 꽤 볼만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노골적인 시선에 담긴 무례함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볼만한 구경거리일 뿐인 K를 쳐다보고, 서로의 귀에 대고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K는 객실 몇 개를 지나는 동안 자신이 몇 년은 늙어버린 것만 같았다. 거의 끝쪽에 도착하자 ‘출입금지’라고 쓰인 팻말이 붙어 있는 문이 나왔다. 팻말이 보이자 비로소 K는 마음이 한결 놓였다.
“여깁니다. 저희가 따로 기차 내에 분실물 센터를 운영하지는 않고요. 이렇게 모아두긴 합니다만 찾아가는 사람들은 거의 드물어서요. 쓸모가 없으니까 그냥 버리고 가는 건지도 모르죠.”
‘쓸모없다’는 말이 K의 귓바퀴에서 왱왱거리며 맴돌았다. 과연 그의 말대로 물건들은 보관, 이라는 표현보다 널려있다, 는 표현이 정확할 듯싶었다. 한 발을 내딛자 각종 물건 위로 켜켜이 내려앉아 있던 먼지들이 반기듯이 일시에 일어났다.
때 묻은 곰 인형부터, 장난감, 운동화, 휴대전화 충전케이블, 쇼핑백, 의류 더미… 같은 것들이 순서 없이 이리저리 ‘널려’있었다. 마치 거대한 쓰레기로 가득 찬 방 같아 보였다. 오래되고 쓸모없는 물건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와 먼지 냄새가 뒤섞여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역무원은 소매로 코를 막고 더미로 몸을 밀어 넣어 무언가를 한 참이나 뒤적거렸다.
“아 여기 있네요, 읏차.”
그는 양손 가득 신발인지 말라비틀어진 고깃덩어리인지 모를 무언가를 가지고 와서 K 앞에 내려놓았다.
“생각보다 없는 게 없네요, 하하.”
역무원은 웃어 보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풀풀 날아다니는 먼지들을 팔을 휘휘 저어 걷어냈다. “이쪽으로 오시죠. 선생님.”
그는 조명이 밝은 조명 아래에 가지고 온 수확물을 자랑스레 펼쳐놓았다.
“한 번 천천히 살펴보시죠.”
잃어버린 건지 일부러 두고 간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것들은 분명히 구두들이었다. 뭉개지고 짓밟혀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을 제외하고 그나마 온전한 구두 세 켤레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실 살펴보고 말고 할 것도 없다고 생각될 만큼 처참한 그것들이었다. 그것은…… 구두, 라기보다는 짓밟히고 학대당한 발을 싸는 포장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는 하얗고 파랗고 노란색이었지만 닳고 닳아서, 때 타고 때 타서 검어져 버린 운동화나 슬리퍼처럼...
“선생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번 신어볼 수 있을까요…”
“네, 한 번 신어보십시오.”
그가 마치 자신의 물건인 것처럼 자랑스럽게 말했다.
구두 안을 탈탈 털자 검은색 모래알 같은 것들이 싸르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쏟아졌다. 신어보니 모두 어디가 헐겁다거나 뻑뻑했고, 어딘가 발에 맞지 않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개중 하나는 그나마 상태가 좋았다. 쓰레기더미 위에서 보낸 시간이 적었던 듯싶었다. 먼지를 얼추 털어내면 썩 괜찮은 구두일 것도 같았다. 하지만 K는 분명히, 자신의 구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뻑뻑하게 발을 조여오는 것이 K는 왠지 불쾌했다. 이딴 걸 어떻게 신고 다니는 건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반면 구두를 신고 있는 K를 보는 역무원의 표정은 기대감에 가득 차있었다. K는 그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구두를 양발에 다 꿰어보았다. 걸어보니 왼발이 쪽으로 하체가 계속 쏠려서 몸 전체가 자주 기우뚱거렸다. 왼발을 들어보니 바깥쪽 신발창이 유독 많이 닳아있었다. 아니야, 이건 내 신발이 아니야. 나는 산 지 얼마 안 됐고 분명 더 검은색……
“와! 딱 맞으시네요! 이제 좀 선생님 다우신 분위기가 나네요. 그러니까 그게 왜 여기 있던 건지 모를 일이네요. 하 참, 별일도 다 있네요, 그렇죠?”
역무원은 박수까지 치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 그런데 이건 아무래도 제 신발이…”
“죄송합니다!”
갑자기 그가 고개를 꾸벅하고 숙이는 바람에 덩달아 K도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어린아이들이 돌아다니면서 장난질을 쳐대는데 선생님 신발을 건드렸나 봐요. 그 나이 때 아이들이 다 그렇잖아요.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부모들이 더 잘 관리해야 하는 데 말이죠. 선생님께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도 저희는 이렇게 고객님의 물건을 마치 제 몸처럼 소중히… 아,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
그가 허리를 쭉 펴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바로잡으며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아 감사합니다……”
K는 고개를 꾸벅 숙여서 그에게 감사의 표시를 전했다. 가지런히 모은 그의 다리 아래 빛나는 검은색 구두가 어딘가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객실 몇 개를 지나쳐 되돌아올 때도 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겨우 자리에 앉은 K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옆자리의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 시트에 앉아 말없이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그림자의 어둠 속에 가려져 있는 구두는 원래 그의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기차의 종점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방송이 객실에 울려 퍼지고 객실이 부산스러워졌다. K가 서류가방을 챙겨 일어서서 뒤를 돌아서자 커다란 배낭을 든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키가 커서인지 아니면 가방이 커서인지는 모르지만, 훌쩍 튀어나온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확 띄었다. K는 남자의 알록달록한 패턴이 들어간 트래킹화에 자꾸 눈이 갔다.
걸을수록 뒤꿈치가 쓸려서인지 K의 표정이 자꾸 구겨졌다. 걸음걸이마저 절뚝이고 있었다. 발을 질질 끌다시피 겨우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발뒤꿈치는 피딱지가 뜯겨나가서 피가 철철 나오고 있었다. K가 아릿아릿한 발을 털어내려 발을 들자 뒤에 서 있던 사람이 인상을 찡그렸다. 죄송합니다, K는 또 한 번 고개를 조아렸다.
K는 휴대전화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열한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뒤꿈치의 고통도 잊고 서둘러 지하철도로 향했다.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개찰구 앞에 줄 서 있었다. 에스컬레이터 쪽에서 마지막 철도가 들어오는 것을 알리는 신호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삑삑거리며 교통카드를 찍어대는 소리의 간격이 점점 줄어들었다. K는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더듬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앞의 여자가 삑, 소리와 함께 활짝 열린 개찰구를 급하게 지나갔다. K는 황급히 외투의 안주머니도 더듬어보았다. 역시나 아무것도 손에 느껴지지 않았다.
“자, 잠시만요……”.
“저기요!”
뒷사람의 짜증 섞인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거의 울상이 된 얼굴로 K는 사람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줄을 빠져나왔다. K는 벌게진 자신의 얼굴이 부끄러워 더욱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 번 외투와 뒷주머니를 확인해보았으나 보드라운 천의 감촉만이 손에 느껴졌다. 외투의 안쪽주머니까지 까뒤집어보았으나 쓸모없는 영수증만 손에 잡혔다. 김밥 4,000원….. 우동 5,000…
K는 영수증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 손에 든 서류가방을 열어 손을 넣고 휘적거렸다. 순간 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가방이 참지 못하고 아가리를 쩍하고 벌렸다. 터진 아가리에서 들어차 있던 서류들이 아낌없이 쏟아져 나왔다. K의 등 뒤에서 탄식 같은 것들이 터져 나왔다. 그는 쭈그리고 앉아 서류 뭉치들을 두 팔로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불현듯 검지가 불에 댄 듯 쓰렸다. 하얀 종이에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졌다. K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쭈그려 앉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종이를 그러모아 대책 없이 아가리를 벌린, 죽은 짐승 같은 서류가방에 그것들을 욱여넣었다. 대충 짐들을 옆구리에 끼고 귀신 같은 몰골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K는 대기실에 앉아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을 소매로 훔쳤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서류뭉치와 셔츠 여기저기에 붉은 핏자국이 묻어있었다. 고개를 숙이자 눈알이 터질 듯이 아팠다. K의 눈알을 비집고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져 구두 코에 닿았다. 시뻘게진 뒤꿈치는 퉁퉁 부어서 마치 혹이 달린 듯 부어있었다. 때마침 K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는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 전화를 귀에 갖다 댔다.

-네. 지금 막 도착했습니..... 아니요. 일단 바로 들어가서 보고서부터 끝내고… 네네. 아닙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니요. 우는 게 아니라, 더워서 세수를 좀 했더니… 네네. 그런데 구두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좀 늦었습니다. 그게 좀… 아니요. 제가 산 건 아니고... 네? 아니… 네? 그러니까 꼭 제가 사지 않을 수도 있잖습니까? 제가 이상한 겁니까. 아니, 전…. 그냥 제 구두를 찾으려고 했는데, 저는 잘 모르고.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제가 산 건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구두를 신고 있었고, 아,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발이 아파서…. 늘어나지도 않고… 벗어놨는데. 업어졌습니다. 네네 찾아봤습니다만… 구두가 다 비슷한 구두긴 한데, 신어보면 알 수 있는데... 아니요, 그러니까 저도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신어봤는데도 알 수가 없어서... 분명히 신어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제가 안 샀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니요… 화내는 게 아닙니다. 저도 제가 고르고 싶었는데, 저는 자신이 없어서... 저는… 잘 모르고 어렸을 때부터 그런 게 익숙해서... 네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안 웁니다. 네네. 우는 게 아니라… 그냥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네네… 저도 너무 황당해서 이런 일이 왜 하필 저한테… 그런데 지갑이… 흐흑, 아니요, 금방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역입니다. 네네,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책상에… 네네. 밤을 새워서라도… 네네. 잘 알고 있습니다. 네 실례했습니다. 네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네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김진호(토목공학 07)  press@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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