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전하는 <화랑세기> 필사본의 진위에 대한 논란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역사학계에서 시작된 논쟁은 국문학계를 비롯해 학계 전반으로 확장됐다. <화랑세기> 필사본이 어떤 과정을 거쳐 발견됐고, 진위에 대한 주장과 근거에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봤다.

자취 감췄던 <화랑세기>, 모습을 드러내다
신라 전제 왕권이 강화되던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 김대문은 화랑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풍월주의 계보인 <화랑세기>를 지었다. 현전하는 <화랑세기>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최초로 나타난다. 고려 인종 때(1145)에 편찬된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귀한 가문의 자제인 김대문이 화랑세기를 기술했는데, 아직 존재한다’는 기록이 있다. 각훈이 고려 고종 때(1215) 편찬한 <해동고승전>에도 <화랑세기>를 인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처럼 신라 중대부터 고려 후기까지도 존재했던 <화랑세기>는 조선왕조의 등장 이후 그 종적을 감춘다. 이후 <화랑세기>는 제목만 남고 실전된 책으로 간주된 채 역사 속에 묻히는 듯 했다. 하지만 뜻밖에 지난 1989년 2월 <화랑세기> 필사본이라고 불리는 문헌이 경남 김해시에서 발견됐다. 가정주부 김경자 씨의 남편 김종진이 한학 가정교사였던 박창화에게 물려받은 <화랑세기> 필사본의 일부가 유품으로 남아 세상에 전해진 것이다. 1995년에는 앞서의 필사본보다 더 상세한 내용이 담긴 모본이 충북 청주시에 사는 박창화의 손자 박인규에 의해 공개됐다.

1300년 만의 귀환, 진위논쟁에 빠지다

 유물들을 토대로 복원한 화랑의 모습

다시 세상에 등장한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위서’가 아니냐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고 있다. 먼저, 필사본을 전한 박창화의 이력이 문제가 됐다. 박창화가 한문학에 밝은 지식인으로, 많은 소설을 지은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노태돈(서울대 국사학) 명예교수는 <필사본 화랑세기는 진본인가>에서 ‘박창화가 <어을우동기>, <도홍기> 같은 한문으로된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룬 소설을 지었다’며 ‘화랑세기 역시 그런 창작의 하나’라고 밝혔다. 책의 여러 부분에 잘못된 기술이 많고, 당시의 시대상과 어긋나는 표현이 많다는 주장도 있었다. 권덕영(부산외국어대 역사관광학) 교수는 “지명과 인명 등이 당시 쓰이던 것과 다르다”며 “모본과 발췌본에 고친 흔적도 많아 위서로 봐야한다”고 전했다. 박창화의 유고에서 발견된 <소설 화랑세기>가 <화랑세기> 필사본과 내용이 거의 같은 것으로 보아 필사본 역시 소설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도 있었다. 박성현(계명대 사학) 교수는 “최근 발견된 유고를 통해 <화랑세기>의 창작 과정을 살필 수 있었다”며 “박창화의 창작으로 봐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필사본이 신라시대에 김대문이 저술한 것이 분명하다는 ‘진서론’이 ‘위서론’에 맞서고 있다. 먼저 필사본에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필사본에 유일하게 구지(해자)가 등장하는데, 1990년 경북 경주 월성에서 구지로 추정되는 것이 실제로 발견됐다. 이종욱(서강대 사학) 명예교수는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에서 ‘구지가 발굴되기 전에는 구지의 존재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며 ‘필사본 화랑세기는 위작이 아니다’고 밝혔다. 필사본에서 사용된 언어와 개념이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라 위작일 수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영훈(서울대 경제학) 교수는 “필사본에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천민이 아닌 평민이 노비로 인식되고 있다”며 “후대의 인간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표현들이 나온다”고 말했다.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향가와 관련 문헌을 살펴 필사본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입장도 있었다. 필사본의 일부에 원본의 내용이 들어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고운기(한양대 문화콘텐츠학) 교수는 “전승과정에서 후대인들이 가필했을 것”이라며 “하지만 완전히 후대의 창작이라 보기엔 옛 시대의 모습이 책에 남아있다”고 전했다.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