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는 대대로 화랑의 우두머리를 지내오던 가문의 자제, 김대문이 바라본 신라의 모습을 담은 책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대문은 신라 귀족의 자제로, 점차 유교화 되는 신라 정세에 반발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540년 위화랑조부터 681년의 신공조까지 이어졌던 화랑의 역사를 <화랑세기>에 서술했다. 이를 통해 신라의 경제력 및 군사력의 강화와 함께 전제왕권의 기틀을 잡는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다.

32명의 풍월주를 통해 보는 화랑의 역사

 2009년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은 <화랑세기> 필사본을 기반으로 구성됐다 (사진=드라마 <선덕여왕> 갈무리)

<화랑세기> 필사본의 주 내용은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들에 대한 것이다. 화랑은 신라시대 왕과 귀족의 자제들로 이뤄져 통일전쟁을 거치며 무사 집단화됐다. 필사본에는 1세 풍월주인 위화랑부터 32세 풍월주 신공까지의 기록이 전해진다. 최초의 풍월주 위화랑의 이름에서 바로 화랑의 명칭이 유래됐다. <화랑세기> 필사본의 서문에 따르면 화랑은 무사집단이기 이전에 신국을 받드는 제사집단이었다. 또한 도를 행하는 수행자였던 그들의 시초는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다.
화랑 조직의 구성도 <화랑세기> 필사본을 통해 알 수 있다. 화랑조직은 낭도 부곡으로 일컬어지며 △화랑 △낭두 △낭도로 구성된다. 그 중 화랑은 진골 및 귀족가문의 자제 중 12세 또는 13세의 뛰어난 자로 선발된다.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아래에는 좌삼부, 우삼부, 전삼부가 있어 각각 13명 정도의 화랑들이 배치돼 있다. 낭두가 될 수 있는 신분은 전임 풍월주와 전임 화랑의 자제였다. 그 아래인 낭도는 서민 신분 이상의 뛰어난 자라면 가능했다.
일반 화랑이 풍월주 직위를 갖기 위해서 거쳐야 했던 의식도 <화랑세기> 필사본에 드러나 있다. 7세 풍월주 설화랑의 이야기가 담긴 부분에는 후계 풍월주인 문노가 도장, 칼, 책을 받아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풍월주의 임명은 왕실의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해왔는데, 풍월주 1세부터 6세까지는 지소 태후의 명을 받아 임명됐다. 풍월주 7세부터 16세을 임명하는 데에는 미실의 역할이 컸다. 그는 용모가 빼어나거나 검술 능력이 뛰어난 화랑을 풍월주로 임명했는데, 그들을 가리켜 ‘부제’라고 한다.
화랑도와 불교 간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는 점도 필사본에 나타난다. 설화랑과 4세 풍월주인 이화랑은 풍월주의 직위를 다한 뒤 불교에 귀의했다. 12세 풍월주 보리공은 원광 법사의 동생이기도 했다. 화랑의 세속오계를 편찬한 사람 역시 원광 법사였다. 이처럼 화랑과 신라인들이 불교를 믿는 큰 이유는 복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 예로 미실이 손녀딸인 유모 낭주가 아들을 낳길 기원하며 천부관음이라는 보살상을 만든 일화도 있다.

왕위계승부터 남녀문제까지, 필사본 속 신라의 모습
<화랑세기> 필사본을 통해 화랑의 모습뿐만 아니라 신라 중대의 모습까지 알 수 있다. 그 모습 중 하나로 왕위 계승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도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일반적으로 왕위계승은 전대 왕의 죽은 뒤 후계 왕이 즉위하지만 25대 진지왕의 경우는 달랐다. 진지왕은 왕위에 올랐지만 색을 밝히는 방탕한 행동을 일삼았다. 이 때문에 사도 태후와 미실은 진지왕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데, 사실 그의 죽음에 다른 이유가 있다는 해석도 있다. 이종욱(서강대 사학) 명예교수는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에서 ‘진지왕은 태자 시절 미실에게 황후로 책봉하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이를 지키지 않아 죽임을 당한 것이다’라고 전했다.
신라시대 남녀 문제 또한 <화랑세기>에 상세히 서술돼 있다. 이 부분에서는 남녀 관계의 제도에 관해 알 수 있다. 높은 사람에게 색을 바치는 미실과 같은 첩들의 모습을 통해 처첩제도의 존재가 드러났다. 당시 신라에서는 처와 첩의 구별이 엄격했다. 또한 족내혼과 근친혼의 모습도 나타난다. 24대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은 지소 태후의 작은아버지이지만, 지소 태후와 혼인했다. 진흥황의 경우 외에도 첩제도와 근친혼의 사례가 <화랑세기>에 다수 기록돼 있다.

필사본, 통념을 뒤집다
<화랑세기> 필사본에 비춰진 역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로 알려진 역사관과 큰 차이를 보인다. <화랑세기> 필사본 속 ‘마복자’의 존재가 그 차이를 설명한다. 마복자란 지위가 더 높은 남성이 이미 임신한 여성에게 총애를 주고, 이후 태어난 아이를 자신의 자식으로 삼는 제도다. 이처럼 남녀 간 자유분방한 성생활이 가능했다는 사실은 기존의 학설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필사본에는 모계 계승과 관련한 내용이 서술돼 있다. 왕과의 혼인을 주도했던 가문을 ‘인통’이라고 하는데, 인통은 여성 중심의 모계 사회적 특징으로 부계 중심일 것이라 생각했던 통념과 완전히 대비되는 것이다.
지배적이던 이념인 유교 사상과 상반됐기 때문에, 1989년 <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되고 사학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역사문화연구소 이희진 소장은 “<화랑세기>에 기록된 내용들이 기존 통념과 방향이 크게 다르다”며 “필사본의 발견으로 당대 자료들이 양적으로 더 풍부해진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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