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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회 부대문학상 소설 부문 가작] 보리들의 루시드드림
  • 서진교(철학 15)
  • 승인 2015.11.2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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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달이 밝았던 날이었으니까 이런 이야기로 시작한다면 어떨까.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겸 철학자인 피타고라스는 달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별들은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세상 모든 것들은 움직이면 소리가 발생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우주는 거대한 질서 잡힌 화음을 이루고 있는데, 자신은 그 경이로운 화음을 들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기 저 달은 무슨 소리일까. 짧은 파장일 테니 여성의 높은 목소리 정도가 되지 않을까. 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 꽤나 아쉬운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그보다 더더욱 애석한 일은 달에게 한마디 건네지도 못하는 게 아닐까. 대학교에서 처음 맞는 방학은 이런 생각을 하며 지냈다. 시간 감각을 잃어가는 나날이었다.

 
*
 
달이 참 밝은 날이었다. 며칠 전쯤, 지나가는 이야기로 오늘이 하지(夏至)라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날도 참 길었다. 그래서 이게 달이 밝아서 거리가 밝아 보이는 건지 아직 지지 않은 해가 거리를 밝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왠지 덜떨어진 해가 거리를 밝히고 있다고 하면 해가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참 할 일 없어 보이기도 하는데다가 초점 풀린 눈으로 정면에 앉아 나를 보는 사람의 귓등쯤을 본다는 느낌으로, 
달이 참 밝네요.
라고 말하면 말하는 나도 문학적으로 말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하고 듣는 사람도 오랜만에 서정적인 느낌을 가져볼 만 했으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판단에 달이 참 밝다고 하였다. 그렇게 날도 길고 달도 밝은 날이어서 집 거실에 앉아 굳이 형광등을 켜지 않아도 밥 차려 먹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거실은 남향으로 창문이 나 있었는데, 창문이 워낙 커서 거의 거실 한 면을 가득 채우는, 아니 거실 한 면이 창문이라고 하는 것이 맞았다. 그 창문으로 초여름의 선선한 저녁 바람이 불어왔다. 무어라 형용사를 붙이기 힘들게 기분이 좋아졌다. 흰 쌀밥을 국에 말아 부족한 듯 먹고 그 허기를 복숭아로 듬뿍 채워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6월이면 조금 이르지 않을까, 걱정하며 꺼내 물은 복숭아가 너무 시거나 딱딱하지 않아 보들보들한 감촉이 만드는 기분을 망치지 않았고 외려 놀라울 정도로 달았으니까. 마치 솜사탕 가장 안쪽, 막대 근처에 조밀하게 엉겨 붙은 설탕 실들이 적당하게 씹히는 듯한 식감이었다. 이대로 복숭아를 잔뜩 먹으면 달에게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여 달을 쳐다보니 열린 창문을 통해 바람이 들어온 길로 달빛이 쏟아졌다. 오늘이면 달에게 가까워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산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까 맞은 저녁 바람이 초여름치고 쌀쌀해서 저지를 한 벌 챙겨 입고 신발을 신고 있으니 안방에서 어머니가 불렀다.
누구 왔니?
저에요. 산책 좀 나가려고요.
오늘 엄마가 아픈데 나가야겠느냐고 엄마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어머니가 일도 나가시지 않고 안방에 계속 누워계셨다는 게 떠올랐다. 그래도 나는 대답했다.
오늘은 달이 너무 밝아서요. 꼭 나가봐야 할 거 같아요.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근처에서 보고 있던 고양이 벼리가 묘오묘오, 울었다. 쓰다듬어주자 계속해서 혀로 내 손바닥을 핥았다. 그러곤 나는 밖으로 나왔다. 달이 참 밝았다.
 
주머니 속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가사 모를 프랑스 노래가 나왔다. 아니, 사실 프랑스 노래인지도 잘 모른다. 가수의 이름이, 들리는 단어들이, 그리고 발음이 왠지 불어인 거 같아서 프랑스 노래가 아닐까 생각할 뿐이다. 여가수가 높게, 하지만 차분하게 읊조리는 가사가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크게 관심도 없었고 그냥 멜로디가 좋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듣는 노래였다. 그렇게 방향도 정하지 않고 달을 보며 이리저리 걸었다. 바람이 시원했다. 딱 엄지손가락만큼만 더 왼쪽으로 걸었다면 치이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트럭이 거칠게 내 옆을 지나가며 만드는 바람도 시원했다.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구름 한 점 없는 저녁 하늘에 달이 참 밝다며 반달과 보름달 사이의 저 형태를 무슨 현달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오른쪽이 보이지 않으니 상현달인가 하현달인가 하며 중학교 때 배운 과학 상식을 되새겨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저 하늘, 달에 사는 토끼 씨는 반달이 되어서 자신은 나오지 않고 절구통과 절구를 든 손만 보일 때면 아마도 머리도 감지 않은 채로 절구를 찧고 있지 않을까, 그저 손만 깨끗하게 씻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만약 그렇다면 토끼 씨를 비열하다고 해야 할까, 효율적이라고 해야 할까 고민하다 토끼 씨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니 존중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결론지으니 흐뭇해져 혼자서 작게 히히, 웃었다.
한참을 걷다가 갑자기 넘어졌다. 밝은 달의 토끼 씨를 보면서 저 달을 보고 걸으면 집을 찾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어느 집 앞의 푸른 쓰레기봉투에 걸려 넘어졌다. 넘어지며 짚은 손이 얼얼했지만 피는 나지 않았으니 탁탁, 털어내고 일어나보니 오른쪽 바지 밑단에 복숭아 껍질이 묻어 있었다. 엉겨 붙은 분홍색 실들도 보였다. 기분 나쁜 단내가 코끝을 찔렀지만 집에 가서 빨면 그만이지 하며 크게 상관 쓰지는 않았다. 넘어진 곳을 뒤돌아보았다. 쓰레기봉투가 대문에서 길가로 많이 삐져나와 있었다. 저렇게 많이 빼놓으니 걸려 넘어지지 생각은 하였지만, 그다지 화는 나지 않았다. 저기 회색 쇠 대문을 한 집의 안주인도 처음에는 대문에 바짝 붙여서 쓰레기봉투를 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쓰레기차가 동네를 돌면서 몇 번이고 자기 집의 쓰레기봉투를 가져가지 않는 일이 있었을 테고 그때마다 이 봉투는 한 뼘씩 한 뼘씩 대문에서 멀어졌으리라. 그러니까 이 쓰레기봉투의 위치는 이 집의 최선의 위치라고 생각하니, 화낼 구석이 없었다.
그렇게,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들고 다시금 걸으려고 하니 거리가 많이 생경했다. 걷는 동안 뉘엿뉘엿하던 해가 완전히 넘어가 버리고 달만 온전히 떠 있어서 그런 걸까. 어느 순간 노래도 나오고 있지 않았다. 자리에 멈춰 선 채 이어폰을 빼고 거리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어색한 골목이었다. 마치 내가 처음 발견한 골목인 것만 같았고, 어쩌면 내가 돌아나가는 순간 없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달이 조금 더 환해졌다. 그래도 이런 어색함이 크게 나쁘지 않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달이 밝았으니까. 그거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더 돌아다녔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 보니 하천가 근처에 포장마차가 늘어진 골목에 와 있었다. 이런 곳이 있었나,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포장마차 안에서 꼬치 굽는 냄새가 나니 술이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입고 나온 저지 안에 우연찮게 지갑도 들어 있겠다, 기분만 내야지 하며 혼자서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
 
서울에 있는 S대학이라고 하면 정확히 무슨 대학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제가 수능을 잘 못 쳐서 말입니다…….
내가 묻자 자신을 서울의 S대학에 다닌다고 소개한 남자가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그는 도수 높은 검은 뿔테안경을 끼고 짧고 단정하게 깎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서울말을 쓰지만 여기 사투리의 악센트가 조금씩 섞인 말투를 구사하는 남자였다. 그가 이름을 말하지 않은 채로 서울에 있는 S대학을 다닌다고만 스스로를 소개하기에 그를 S라고 기억했다. 그러곤 S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그쪽을 뭐라 불러야 할지 막막해서 하는 말인데, 무슨 대학 무슨 과를 다니시는지…….
S가 익숙하다는 듯 나에게 이렇게 묻자 Y가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쿵, 하는 소리가 나자 S는 잠시 돌아보았지만 Y의 오묘한 표정은 보지 않고 다시금 나를 쳐다보았다. S는 Y를 소개할 때에도 이런 방식이었다. Y는 여기 근처에 있는 지방 국립대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그와 자신은 고교 시절 그다지 성적이 차이가 나지는 않았지만, Y같은 경우엔……, S가 Y의 눈치를 잠시 보더니 Y가 괜찮아, 괜찮아 말하니 말을 이었다. Y같은 경우엔 자신과 비슷한 대학을 올 수 있었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집을 떠나서 살지 못한다고, 그리고 지방 국립대학을 다니면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성적이어서 들어갔다고 Y를 소개하며 지방의 대학을 다니긴 하지만 가정을 일으켜 보려고 열심히 하는 게 참 기특하다고 말했다. 내가 기특하다는 표현을 두고 입맛을 다지는 동안 Y는 기지개를 켜며 에이 참, 하고 중얼거렸다. 여하튼 나도 대답했다.
아, 저 같은 경우에도 이 근처에 K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대답하자 그의 눈에서 긴장이 풀리고 그제야 서울의 S대가 정확히 무언지, 거기서 상경대학을 다니고 있다며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러곤 철학이란 거, 참 선택하기 힘든 거 아니냐며 어쩌다 선택하게 된 것이냐 묻기에,
뭐랄까, 인생이라는 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못해 소용돌이 같은 것에 휘말려 다 내려놓고 하늘만 보게 되는 것 아니겠냐고, 그러다 착지한 곳이 철학과라고 대답했다. Y가 약간은 시비조로 인생의 소용돌이라는 게 착지를 할 수 있는 거냐고 묻자 S가 중재하듯 이야, 그거 참 철학도 다운 대답인 듯하다. 하고 마무리 짓기에 나도 그냥 하하, 그렇게 보이느냐 하고 말았다.
어색하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술잔이 몇 잔 돌았다. 차갑던 술병마저도 어색하였는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급조된 자리에 이리도 무겁게 처진 분위기라니, 처음 계획한 대로 적당히 자리를 뜨려고 아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며 정중하게 자리를 뜰까 아니면 그저 이만, 저는 가보아야겠습니다, 하며 의사만 말하고 자리를 뜰까 고민하며 작게 입으로 뇌까리는 도중에 S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기에 더 앉아 있자고 마음먹었다.
 
혹시 루시드드림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자각몽(自覺夢) 말씀하시는 건가요? 얼핏 들어본 적은 있는 거 같습니다. 꿈속에서 꿈이라는 걸 알고 나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내가 대답했다. Y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내가 정확히 설명해달라고 부탁하자 S가 말을 이었다.
예 맞습니다. 그런데 이게 참 재미있습니다. 저희 학교, 그러니까 S대학 선배가 처음 가르쳐주었는데요. 꿈이라는 게 사실 어떻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악몽 같은 것도 있고, 자주 꾸니까. Y가 거들었다. S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저도 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게 참 폭력적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루시드드림, 이 자각몽이라는 꿈 안에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점을 흥미롭게 느꼈습니다.
폭력적, 이라고요.
예. 충분히 폭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 말에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자 Y가 대체 그런 것까지 폭력적이면 세상에 폭력적이지 않은 게 뭐가 있겠냐고 Y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여하튼, S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이게 꾸고 싶다고 해서 단번에 자각몽을 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준비동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 준비동작이라고 하니 되게 어감이 이상하긴 한데, 생각, 그러니까 의식해야 할 게 많다는 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꿈들 꾸실 때 아, 내가 꿈을 꾸고 있구나 하고 생각한 적 잘 없지 않습니까. 아마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생각을 하곤 금방 잠에서 깼을 것입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꿈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군요. 나는 의자를 당겨 앉으며 물었다. 그런데 많은 의식해야 하는 것들이라면 정확히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말을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보십시오. S의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차갑게 말이 튀어나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까 말한, 꿈을 꾸면서 내가 꿈을 꾸고 있구나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건 이를 깨닫고 나서 꿈에서 깨지 않도록 유지해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꿈을 꾸면서 꿈이구나, 깨달을 때 직접적으로 이게 꿈인가 아닌가를 생각하면 바로 꿈에서 깨버립니다. 그는 한 손을 쥐었다가 피며 퐁, 소리가 나게 입술을 튕겼다. 그래서 비유적인 방법을 쓰라고는 합디다. 직접적으로 손가락으로 다른 쪽 막힌 손바닥을 찔러보거나, 혹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상상을 따위를 말입니다. 이것들이 통과한다면, 꿈인 것이 확실해지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한 번도 꿈꾸는 도중에 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처럼 그런 비유적인 생각을 꿈꾸는 도중에 떠올리지 못하면 영영 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말했다.
그래서 준비동작이 많다고 한 것입니다. 평소에 자고 일어나면 꿈꾼 일기를 쓰다 보면 사람마다 꿈이다, 싶은 특징들이 보이곤 합니다. 아니면 손바닥을 통과시키는 것들 따위를 계속하여 반복해서 습관이 되면, 꿈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했는데 손바닥이 통과가 된다. 이러면 꿈인 걸 알지 않겠습니까.
굳이, 나는 잠깐 생각하고 말했다. 원하는 꿈을 꾸기 위해서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하는 말로, 귀찮지 않을까요.
글쎄요, 저는 차라리 유쾌했던 것 같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흐음. 나는 입을 다문 채로 콧소리를 내며 그저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불현듯 S가 약간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어느 부분이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불쌍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S씨는 루시드드림이라는 거, 성공하셨습니까.
예. 보름 조금 넘게 일기를 쓰고 습관을 들이니 어느 순간부턴가 꾸고 있더라고요. 마치 쩌저적,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빙판길을 걷는 것 같았습니다. 꿈인 걸 알지만 꿈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는 데에는 마치 마약적인 재미가 있었습니다. 더 재밌는 것은 이상하게 그런 느낌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차라리 익숙했지요. 그러곤 어느 순간 됐다, 싶은 때가 있는데 그때도 긴장을 놓아버리면 바로 잠에서 깨버립니다. 말 그대로, 끝없이 긴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공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건 뭡니까. 제가 얼핏 듣기로는 날아다니는, 그러니까 하늘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그렇게 기분이 좋다고 하던데요.
그건 그다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하늘을 날아다녔는데 얼굴에 맞는 바람이 차가울 뿐 별 감흥은 없었습니다.
달이 가까이, 더 커 보이지 않았나요? 내가 물었다.
예? 그는 잠시 당황하더니 말했다. 글쎄요, 달이고 해고 뭐가 떠 있는지는 전혀 생각하질 않았습니다.
아니 그 중요한 걸……, 내가 말하려고 하자 S는 말을 끊고 말했다. K씨, 우리 솔직해집시다. 고상한 척이나 젠체하지 말자는 소립니다. 우리. 사실 이런 거 하는 이유는 술이고, 약이고, 폭력이고 여자 아닙니까. 그러자 Y가 여자, 음음, 그렇지.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제가 이 자각몽에 익숙해지고 나서 제일 처음 한 것은 수십 명의 여자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연예인이고 전 애인이고 현 애인이고 예전에 짝사랑하던 여자까지 모두요. 그들을 비싼 스포츠카에 되는대로 엉켜 싣고 도로를 질주했습니다. 머리통을 제 가랑이 사이에 처박은 전 애인은 비싼 양주로 머리를 감았는지 정수리에서 알코올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열어둔 창문에 걸친 왼팔에는 여러 주삿바늘 자국이 멍들어 얼룩덜룩했지만 눈을 깜박, 하고 보니 모두 나아있더군요. 처음에는 두 개로, 다음에는 네 개, 결국에 열여섯 개로 보이는 차선이 꿈틀거렸습니다. 그렇게 달리면서 옆에 경찰서나 관공서, 아니 비단 관공서뿐만이 아니라 큰 빌딩 따위가 지나가면 내려서 유리를 깨고 불을 지르며 다녔습니다. 불꽃이 무언가를 타닥타닥, 태우는 소리가 베이스가 되고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를 하이햇으로, 자동차 엔진 소리를 기타 리프라 생각하니 근사한 락 밴드가 되더군요. 그래서 악을 쓰며 고성방가를 했습니다. 창문 밖으로 쳐다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군요.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놀다가 다음으로 많은 여자들을 이용했습니다. 질펀하게 뒤엉켰지요. 차에서 거리에서, 심지어는 불타고 있는 건물 안에서도 말입니다. 거리낄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차라리 짓눌린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정도까지 뒤엉켰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깨고 나니 그 정도까진 다시 하고 싶지는 않더군요. 큰 이유는 아니고요, 다음날이 너무 피곤해서 말입니다. 잠을 전혀 자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소돔과 고모라, 라고 중얼거렸다.
그곳 사람들에게도 그곳이 굳이 나빴다고 말하긴 힘들지 않습니까. 하하, 그리고 사실 이런 걸 하려고 그 많고 다양한 준비를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의 이야기에 나는 갑자기 대화의 수위가 너무 높아지지 않았나 생각되어, 나는 쉽사리 이해할 수 없다는 느낌으로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니 S가 눈썹을 살짝 으쓱, 하더니 옆에 앉아있는 Y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길게 하였다. 그동안 나는 분위기를 읽었다. 생각해보니 S의 태도가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렇게 생각한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해를 해 보려고 생각을 하려는데 술을 마셔서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도 그냥 말했다.
생각해보니, 틀리지 않은 말인 것 같습니다.
아,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처음 보는 자리에서 너무 자극적인 이야기를 한 게 아닌가,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극단적인 생각들을 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S가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집의 벼리 생각이 들었다. 금방 들어간다고 했는데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거실에 앉아 현관문만 쳐다보며 묘오묘오, 울고 있지나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벼리 저녁을 주지 않은 게 생각났다. 내 복숭아 먹는 것에만 집중했지 벼리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집을 나설 때 더 세차게 머리를 비볐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죄책감이 심하게 들었다. 아마도 벼리라는 이름 때문에 드는 죄책감이 아닐까. 벼리라는 이름은 일전에 만나던 여자의 이름이었다. 그녀의 이름에 대해서 묻자 그녀는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라며 벼리라는 단어 자체는 고기 잡는 그물을 잡아당기는 동아줄이라는 뜻인데, 흔히들 기강(紀綱)이라고 쓰는 말이 벼리 기에 벼리 강을 쓰는 단어라며 이러한 규율과 법도의 근간이 되는 사람이 되라고 지어준 이름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내가 알던 뜻인 글의 뼈대나 줄거리 따위를 말하는 벼리가 아니냐며 괜히 너무 복잡하게 알고 있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가 직접 말해준 것이라며 정확하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그녀의 이름의 뜻이 줄거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양이 벼리에게 미안해서 당장 집으로 뛰어가서 저녁밥을 주고 올까 생각했다. 아니, 고양이 벼리도 저녁밥을 주지 않는다면 사람 벼리처럼 갑자기 떠나버릴까 걱정되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사람 벼리와는 오래전에 헤어졌다. 그녀는 헤어질 때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한마디만 하고 떠났다.
 
어차피 말해도 듣지 않을 거잖아.
 
그녀의 목소리는 높고, 차분했다. 나는 언제나 그녀의 말을 잘 들었다고 생각했다. 이해되지 않았기에 더 마음이 아팠다. 그렇다고 벼리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녀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겠거니, 했을 뿐이다. 그래도 마음 한 켠이 텅 빈 듯 아파서 그때부터 이름을 벼리라고 지은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우기 시작했다. 벼리는 그런 여자였기 때문에 고양이 벼리도 도망가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었다. 술기운이 점점 더 사람 벼리와 헤어지던 순간으로 나를 데려가고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신을 차린 순간, S가 말을 끝맺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던 겁니다.
아 예, 이해합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S와 Y모두 이 대답을 이상해하지 않았다. 그러곤 초여름 밤 공기에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술을 몇 잔 더 마셨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그런데 꿈이라는 게 그렇게 원하는 대로만 되면 재미가 없지 않을까요. 내가 물었다.
무슨 뜻이죠.
꿈이라는 게 좀 우연적이고 다양하게 바뀌는 재미 아닐까 해서 말입니다. 어떤 꿈을 꾸게 될지, 그러니까 어떤 배경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그런 맛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원하는 대로만 되는 걸 과연 꿈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것도 조금은 의심스럽고요.
젠장, 꿈에서라도 그런 걸 바라면 안 되는 겁니까. 플라스틱 탁자를 거칠게 치며 Y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말한 꿈에 가장 큰 문제는 우연한 듯 보이는데, 전혀 우연하지 않단 점입니다. 꿈에서마저도 저는 키 작고 뚱뚱하고 얼굴에 울긋불긋한 여드름 자국이 흉측한데 심지어 아버지까지 없는……. S는 Y를 잠시 쳐다보았지만 어깨에 손을 조심스레 얹기만 하였다. 꿈에서 돈이 많으면 뭐합니까. 어차피 아비 없는 자식인데요. 옆의 여자가 예쁘면 뭐합니까 저는 꿈속에서도 이렇게 생겼는데요. 그래서 차라리 자각몽이라도 꾸면 다 뜯어고칠 수 있으니……. 당신들은 모를 겁니다. 그게, 그게 더 우연한 거라는 걸. 술을 마셔서인지 Y는 조금 격하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나는 작게 웅얼거렸다. 나는 발밑을 쳐다보며 탁자를 칠 때 굴러떨어진 과자를 밟았다. 콱, 하는 소리와 함께 과자는 산산이 부서졌다.
목소리가 커지자 싸움이 난 줄 알고 주방 쪽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그를 보고 놀라는 S와 Y의 표정이 서로가 아는 사람인 눈치였다. 그는 S와 Y를 보며 잠시간 머뭇거리다가 어떻게 알고 온 것이냐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S는 그냥 아무 데나 잡고 온 것이라고, 나도 네가 있을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 정도 이야기를 주고받다 Y가 그에게 술이나 한잔 받으라고 하자 그는 일하는 중이라 안 된다고 말했고, 일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S가 물었다.
시간당 얼마짜리 일인데?
7,000원. 짧게 대답하더니 그가 작게 덧붙였다. 근데 일이 좀 힘들어.
그래도 7,000원이면 괜찮지. 아르바이트로 7,000원 받는 곳 거의 없잖아. 요즘 돈 벌기가 쉬운 것도 아니고.
나 아르바이트 아닌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여기서 계속 일해. 일 좀 배우고 돈 좀 모아서 나도 포장마차나 차리려고.
그러면 힘들다고 하면 안 되지. 더 열심히 할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S가 훈계하듯 말했다.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몇 번 더 주고받다가 그는 다시 일하러 간다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Y가 S에게 쟤는 너 월에 40 받으면서 고등학생들 과외하고 다니는 거 아냐고 물었고, S는 아마 모를걸, 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돈 벌기가 어렵다고 말한 것은 무슨 말이었냐고 묻자 S는 당연하다는 듯 S대학에 들어간 것부터 나는 어려운 걸 한 게 아니냐고 말했다. 준비했던 대답이었냐고 묻자, 대학 선배들이 했던 말이라고 하였다. S가 그에게 과외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이 기만일까 배려일까를 잠시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기만 쪽의 추가 더 무거워 보였다. 그래도 굳이 말로 꺼내지는 않고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각자 앞의 술잔에는 각자의 얼굴이 비쳤다. Y가 술을 따르기 무섭게 마셔버리는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두어 잔쯤 더 마시다 보니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물이 마시고 싶었다. 내가 물을 찾자 S는 물병을 가져와야 한다며 저쪽 냉장고를 가리켰는데 Y가 나를 보며 말했다.
혹시 보리차 좋아하시나요.
 
아까의 큰소리쳤던 것이 미안했는지, 아니면 술이 오른 것인지 과묵하던 Y의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집에 계신 어머니가 보리차를 정말 좋아하십니다. 그분 말씀으로는 보리차가 만병통치약이지요. 그 만병에는 물론 술도 포함되어 있는데 어머니는 술을 마시면서 보리차를 함께 마시면 취하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시고, 다음날에 숙취를 해소하는 데에도 보리차를 추천하시는 분입니다. Y는 한 손으로 손세수를 한 뒤 머리를 쓸어 넘기고 나서 말했다. 그런데 저는 이 보리차가 정말 싫습니다. 집을 떠올리면 언제나 보리차 끓이는 냄새가 나는데, 이 냄새가 저에겐 너무나 역합니다. 그래서 제가 만날 투덜거리면서 보리차 좀 그만 끓이라고 말해도 어머니는 계속해서 보리차를 만드십니다. 거기다가 어머니는 언제나 가방 속에 아무도 모르게 보리차 한 병을 넣어두십니다. 이 물을 마시고 좋은 생각과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면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저는 이런 비논리적이고 억지스러운 강요가 싫어서 집에 도착하기 전에 아무데나 보리차를 부어 버립니다.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 가방에서 페트병에 담긴 보리차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싫어한다는 이야기와 버리는 물이라고 말하고 남한테 주니까 좀 이상해 보이긴 합니다만, 보리차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이 보리차를 먹어도 되는 건가 생각은 했지만 그가 문제가 없다고도 하였고, 그 나름대로 화해의 의미로 건네는 느낌이 들었기에 거절하기도 뭐했다. 그래서 그냥 받아마셨다. 생각보다 보리차의 맛은 괜찮았다. 아니, 그의 설명 때문에 어느 정도 맛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마셔서 그랬지 그 보리차는 정말 맛있었던 거 같다.
어떻습니까. Y가 묻기에 여기서 보리차가 맛있다고 하면 Y가 이상해질 것 같았고 그렇다고 맛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느낀 대로 되게 맛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Y가,
그게 맛있긴 합니다. 특히 더운 날 목축일 때는 시원한 보리차만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럼 Y씨는 집에서 보리차를 안 드십니까? 내가 물었다.
그냥 싫을 뿐이지, 이 보리차를 저희 집에서는 물 대신 마셔서 안 마실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원하게 식은 보리차는 그나마 괜찮습니다. Y의 이러한 대답을 듣고, S가 그럼 따뜻한 보리차는 싫은 것이냐고 물었다. 따뜻한 보리차라는 말을 듣자 Y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금방 표정은 돌아왔지만 뜨거운 보리차라고 하자고 하였다. 무슨 큰 차이냐고 S가 캐묻자 Y가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보리차의 맛을 결정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언지 아십니까.
좋고 맛있는 보리를 쓰거나, 보리를 볶을 때 어떻게 잘 볶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내가 대답했고 S도 그에 동의한다는 듯 끄덕거렸다.
사실 그것들은 두 번째 문제입니다. 너무나 당연해서 사람들이 잊고 지나치는데, 보리차가 맛있으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좋은 물과 그 물을 얼마나 팔팔 끓이느냐의 문제입니다.
장난 같은 대답에 나와 S는 허탈하게 하, 하고 실소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는 Y의 표정이 비장하다 못해 한을 품고 있는 듯해서 길게 웃지는 못했다.
농담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보리차에서는 물이 가장 중요합니다. 맛없는 물에 보리차를 끓여 보셨습니까. 비단 보리차뿐만이 아니라 모든 차 종류라면 똑같습니다. 물맛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물맛은 끓이는 것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이 시원한 보리차는 시원한 물에다가 볶은 보리를 냅다 풀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팔팔 끓는 물로 보리차를 만들고 그 뜨거운 보리차를 식힌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그가 준 보리차를 쳐다보았다. 500mL 페트병 속에 보리가 세 알 정도 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리는 두 번째, 아니 생각해보면 세 번째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 물을 끓일 때의 방식도 상당히 중요하거든요. 어떤 주전자를 쓰는지, 아니면 가스불로 끓이는지, 요즈음에 인덕션을 쓴다든지 하는 것들 말입니다.
어렵군요. 내가 말했다.
어렵다고요? 어디가 어렵다는 겁니까? Y가 되물었다.
어디가 어려운지 잘 모르겠어서 어렵습니다. 어떻게 보면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어쩔 수 없다……. 보리차의 심정 아닐까요. Y가 말을 이었다. 사실 제일 중요한 건 물인데 남들은 보리만 보고 보리차네 뭐네 하니까 말입니다. S가 말하는 폭력이 사실 이런 곳에 쓰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 말을 하며 Y는 처음 잔을 거칠게 내려놓을 때처럼 오묘한 눈빛으로 S를 쳐다보았다. S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술김이 올라 바닥을 보고 한숨을 푸, 하고 쉬었다. 그러더니 S가 너는 그렇게, 그렇게 보리차를 싫어한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보리차에 대해서 잘 꿰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Y는 자기가 보리차를 먹기 시작한 것은 기억하기도 이전부터였다고, 좋다 싫다 하기도 전에 이미 알던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보리차를 좀 더 알면 뭐랄까, 애착 같은 게 생겨 좋아지지나 않을까 생각하여 많이 찾아보았는데 찾을수록 결국 물이 더 중요하다는 걸 점점 더 혁혁히 깨달으니 더욱이 싫어질 뿐이었다고 말했다.
이거 참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다니요. 그런 패배자 같은 변명은 하지 맙시다. S가 말했다. 그러면서 S는 그런 태도로는 무엇도 바꿀 수 없다면서 뭐라도 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말했다. 술 때문인지 패배자라는 그의 날카로운 말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고, 그의 말은 귓가에 윙윙, 거렸지만 귓속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냥 보리차가 안됐다는 생각을 했다. 보리차. 보리. 보리 벼리 벼리 별 별 별 달……. 벼리와 달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참 달이 밝았는데 벼리도 그 달을 보고 있을까. 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는데 달이 보고 싶은 것인지 고양이 벼리인지 사람 벼리인지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K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S가 물었는지 Y가 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오늘 참 달이 밝았는데,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하하, 역시 철학도는 무언가 달라도 다른 것 같습니다. 라고 S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그러면 그렇게 규정짓는 건 상경학도스러운 겁니까. 내가 똑같이 받자 Y가 이상하리만큼 크게 웃었다.
 
*
 
벼리가 걱정되었다. 그래서 나는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아, 사실 저희도 슬슬 일어나려고 했습니다. S가 답했다.
여기 사람을 불러 얼만지 물어봐야겠습니다.
이미 마시면서 제가 얼만지 계산해보았습니다. 여기 남은 술 반병까지 해서 총 2만 2,000 원입니다. S가 말했다.
누군가 한 명이 8,000원을 내고 두 명은 7,000원만 내면 된다는 계산은 했지만, 선뜻 팔천 원을 내고 싶지는 않아 7,000원 8,000원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고 있으니 S가 말을 끊으며 돈을 내밀었다. 7,340원입니다. 제가 10원 더 냈습니다. 그는 돈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그 손으로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러면서 말했다.
K씨, 우리들 무언가 가식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필요 이상으로 깨끗한 음성으로 답했다.
저는 K씨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밝히기 싫다는 표현이 적절하겠군요. 뭐, 거의 같은 표현일까요. 그러면서 그는 잡은 손을 강하게 쥐며 말했다. 도망치지 마십시오.
예? 예…….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애매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돈을 모으고 있는데 주방에서 사장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나왔다. 그의 손에는 꼬치가 몇 개 담긴 접시가 들려 있었다. 그는 우리 테이블에 다가오더니 말했다.
아, 벌써 가게? 주방에 동생 친구라고 해서 서비스로 가져온 건데. 왜, 여기 술도 반병 남았는데 마시고 가지?
아 괜찮습니다. 뭐 이런 걸 다, 이렇게 서비스 주시면 마진도 안 남을 텐데 괜찮습니다. S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은 안 받는다고 하였지만 이미 다시 앉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 또한 괜찮다며 어차피 곧 마감할 건데 남는 잉여분이라고 괜찮다 괜찮다고 하였다. 그런데 S가 괜찮지 않았다. 그는 잉여분이라는 단어에 크게 반응했다.
잠깐만요. 여분이면 이렇게 막 줘도 되는 겁니까?
아니, 남는 거라서 공짜로 주는 거라니까? 사장처럼 보이는 남자는 갑작스러운 S의 반응에 당황하여 요지를 잘 못 잡는 듯했다.
그러니까 남는 거라서, 잉여분이라서 공짜로 준다는 거 아닙니까. 걔네도 돈 받고 팔아야지 왜 공짜로 주는 거냐고요. S가 이렇게 말하는 도중에 Y는 반병 남은 술을 다시 열어 꼬치와 함께 먹기 시작했다. Y는 크, 하는 소리도 내지 않고 쓴 술맛을 즐겼다. 남자는 더더욱 당황하여 이게 무슨 상황인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듯 했다. S는 그러한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애초에 안 남게 재료를 사던가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겁니다. 이 꼬치들은 왜 공짜로 손님들 테이블에 올라가고 있는 겁니까! 그가 마지막으로 소리치자 사장은 큰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듯 말했다.
이것들이 술 처마시고 미쳤나. 너 뭐하는 놈이야?
저요? 서울에 S대 다니는 놈입니다! S가 말을 받았고 곧 크게 싸움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이때다 싶어 그들에게 들리긴 하지만 전혀 주의를 끌지는 못할 정도로 화장실 좀 다녀와야겠다고 말하고 포장마차를 빠져나왔다. 빠져나오는 길에 방금 전에 S가 말했던 도망치지 말라는 말이 귓가를 배회하다 그제야 귓속으로 들어왔다. 그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나는 벼리 밥을 줘야 하여 이렇게 싸우고 있을 겨를이 없다고, 무엇보다 집에 계신 어머니가 아프신데 빨리 들어가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죄책감 한 숟갈을 덜어냈다. 그렇게 빠져나온 포장마차 밖의 달이 참 밝았다.
 
*
 
포장마차 밖을 빠져나와 다시 이어폰을 끼었다. 익숙하지만 가사는 모를 프랑스 노래가 다시금 흘러나왔다. 집에 가야지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밝게 빛나는, 하지만 약간은 찌그러진 달에 토끼 씨의 손만 보였다. 효율적인 걸까, 비열한 걸까, 또다시 고민했지만 왜인지 비열한 게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비열하다, 비열하다 반복하니 비열한 게 토끼 씨가 아니라 어쩌면 손바닥만 보고 판단하는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시큼한 냄새가 났다. 바지 밑단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 냄새를 피하려 턱을 길게 빼어 얼굴을 하늘과 맞닿게 하고 크게 숨을 쉬었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마음이 안정되려는 순간에 귓속으로 들어왔던 S의 말이 이제는 머릿속에서 울렸다. 도망치지 마십시오. 하늘을 날아 달에게 가까이 가는 것보다 몸을 뒤섞는 게 더 유쾌하다고 말했던 S의 말이 떠올랐다. 술기운이 나를 점점 부추기고 있었다. 바로 옆 골목의 홍등가의 가로등이 달처럼 빛났다. 다시금 시큼한 냄새가 났다. 어디선가 토끼 씨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올 때 길을 어떻게 찾지. 가로등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달을 보고 걸으면 집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 대답했다. 벼리가 떠올랐다. 벼리 밥을 줘야 하는데 생각하다 이내 아니다, 벼리는 배가 고프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벼리는 배가 고프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고 이어폰 음량을 서너 칸 더 올렸다. 여가수의 가사를 몰라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달이 참 밝았다.

서진교(철학 15)  press@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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