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살아가는 곳에는 불균이 발생한다. 식량, 권력, 의무, 임금, 지역... 삶의 모든 분야에서 불균이 발생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 불균을 원천적으로 해소하면 행복한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생각은 무지이거나 선동이다. 인간은 공평을 추구할수록 더 예민해지고 더 세심한 공평을 추구한다. 그래서 완전한 공평은 끝내 오지 않는다. 예를 들어 농지를 똑같은 면적으로 분배하면 공평한 것일까? 그건 농사를 지어보지 못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다. 지형조건에 따른 토질과 생산량의 차이는 크다. 우리처럼 산곡이 많은 지형은 더 그렇다. 바로 경계를 맞대고 있는 토지 간에도 심각할 정도로 차이가 난다. 화학비료와 농약이 없던 과거에는 이 차이가 더 컸다. 그러면 이런 제안이 나온다. 농지에 등급을 주고 등급에 따라 면적에 차이를 주자. 주기적으로 농지를 바꾸며 로테이션으로 경작하자. 이것은 원천적 평등이 아니라 조정이다. 조정을 위해서는 국가와 같은 상위 권력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다 이 조정의 방법을 놓고 다툰 것이다(다만 사회주의가 얼핏 원천적 균등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 쉽고 그 효과를 즐길 뿐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조정기능이 잘 안될 때, 사회는 폭동이 발생하거나 더 크고 강한 조정능력을 요구하게 된다. 그런 사례가 고구려 고국천왕 16년(194)에 시행한 진대법이다. 진대법은 춘궁기에 국가가 곡식을 꾸어주었다가 가을에 저리로 갚도록 한 것이다. 진대법을 최초의 복지정책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진대법 같은 제도는 그 이전부터 지주와 농민 간, 촌락과 부족사회에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중국, 고대 그리스와 로마, 아마존 깊은 곳의 부락에까지 세계 공통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광범위한 자연재해가 엄습하면 씨족이나 부족의 거주 지역 전체가 피해를 입게 되고 그 사회는 조정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렇다면 다른 지역을 침공하거나 더 상위의 조직에 의존해야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국가이고 제국이다. 진대법이 바로 이런 경우로, 부족이 하던 조정 기능을 국가로 확장했다.
  조선시대에도 원천적 균등에 대한 욕구는 강했다. 그래서 정전법, 균전법, 한전법(토지소유의 상한을 정하는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조선시대 내내 존재했다. 단 이것이 완전한 균등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평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평등이자 균등분배였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학자인 정약용은 이 설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전론(田論)이라는 글에서 지형과 입지, 토질의 차이로 토지의 균등분배는 불가능하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그는 분배의 단위를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이것이 일종의 집단농장인 여전제(閭田制)이다. 여전은 50호 미만의 마을이다. 구성원은 개인 토지를 가지지 않고 공용의 토지를 공동 경작한다. 수확물은 다 합해서 균등하게 나누되 구성원의 노동 일수에 따라 차이를 둔다. 집단경작에서 발생하는 남에게 미루기와 생산성 저하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조정기능을 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로 필연적으로 관리, 감독의 권한이 중요해 진다. 정약용은 이 마을의 지도자로 1명의 여장을 구상한다. 여장의 권력은 절대적이다. 마을 구성원이 경작할 농지, 생산물의 분배는 모두 여장이 결정한다. 심지어 물리력까지 제공한다. 전시에는 이 마을 공동체가 그대로 군대로 전환한다. 그리고 여장이 그대로 부대의 지휘관이 된다. 마지막으로 마을 공동체는 행정의 최하 단위이기도 하다. 정약용은 본의 아니게 강력한 경제, 사회, 군사, 행정을 독점하는 독재자를 탄생시켰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민주=복지’라는 등식을 너무 쉽게 당연시한다. 그러나 역사가 시작되던 시기부터 복지와 같은 조정기능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군사, 치안)는 의무와 함께 국가 권력을 확대하는 2개의 축이었다는 사실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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