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피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병국(배성우 분) 과장이 퇴근 후 자신의 일가족을 살해하고 회사로 돌아왔다는데 나가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인턴 이미례(고아성 분)는 오늘도 야근이다.
단 두 줄의 시놉시스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상상력을 유발하는 영화 <오피스>는 듣던 대로 무서운 영화였다. 그런데 그 공포는 영화적 상상력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곧이곧대로 번역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종을 달리한다. 장르의 필터를 거치지 않은 채, 그저 우리 사회의 맨얼굴이 시종일관 클로즈업된 영화랄까. 이 영화는 한국 사회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에 착안하여 그 사실을 절감하게 하는 것으로도 공포영화의 필요충분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한마디로, ‘헬조선’의 영화적 번역 아니, 직역본이 <오피스>인 셈이다.
영화는 마치 여주인공 이미례가 존속살인마 김병국의 손아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어떻게 그 괴물을 해치우고 영웅이 될 것인가를 보여줄 것처럼 시작한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할 리 없다. 가슴에 칼을 품는 대신 사무실 서랍에 칼을 넣어두었던 김병국이 이미례에게 그 칼을 건네주었을 때, 그들은 이미 두 개의 육체에 깃든 하나의 정신을 나누고 있었다. “넌 나랑 비슷해”.
회사의 왕따 중간관리자인 김병국과 내일이 불투명한 인턴사원 이미례는 정글의 포식자들 사이에서 가장 취약한 먹잇감들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괴물이 된다. 흥미롭게도 괴물의 징후는 엉뚱한 곳에 있었다. 어느 날 이미례의 직속선배가 그녀에게 툭 던진 한마디, “자긴 너무 열심히 해. 그게 문제야. 좀 없어 보인달까”. 영화에 긴 파문을 남기는 이 한마디는 ‘묵묵히 자기 일만 열심히 한 사람’이라는 김병국 과장에 대한 세평과 정확히 겹친다. 이미례와 김병국처럼 절박한 이들에게는 없어 보이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삶에서 단 한 번도 절박해본 적이 없었던 듯이, 혹은 그 시절을 다 잊은 듯이 벼랑 끝에 선 이들을 조롱하는 이 폭력의 언어는 무심해서 더 치명적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이미례의 반격은 정당화되는가? 우리는 여전히 그가 어찌하여 괴물이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우회하자면, 공포영화로서 <오피스>가 지닌 전복성은 자아(주인공)와 타자(괴물) 간의 거리를 지워버리고 ‘내가 곧 괴물’이 되는 지점에 있다. 물론 관객인 우리는 주인공 편에 서서 타자와 싸우는 이야기를 훨씬 편안하게 받아들이곤 한다. 우리의 통념 속에서 괴물은 나 아닌 다른 존재이며, 이때 괴물은 우리에게 그 어떤 질문도 던지지 않는다. 괴물만 퇴치하면 만사형통, 자아는 온전하게 지켜지고, 세계는 다시 안온해진다. 그러나 우리가 동일시한 주인공이 괴물이라면 사태는 좀 더 복잡해진다. 그때 괴물의 위치는 나도 가앉을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의 자리를 의미한다. 요컨대 나(자아)는 왜 괴물이 되었는가, 혹은 무엇이 나를 괴물로 만들었는가라는 좀 더 구조적인 질문이 따라붙는 자리다. 현대 공포영화의 괴물은 더 이상 밖에서 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피스>의 괴물은 내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오피스>에서 칼을 묵주 같은 것이라며 품고 다니던 이가 그 칼을 휘두를 때, 헬조선의 이른바 ‘죽창론’이 곧장 떠올랐다. ‘죽창 앞에서는 공평하게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이라는, 박탈감과 좌절 끝에 탄생한 증오의 언어. <오피스>는 헬조선의 죽창론을 이토록 투명하게, 직설로써 구현한다.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 피범벅의 살육전이 휩쓸고 간 자리에 무고한 얼굴로 뜻하지 않게 구원된 괴물은 우리 귀에 은밀한 카타르시스를 속삭여 온다. 이제 공평해진 거지? 그게 우리를 무섭게 하려는 의도였다면 성공한 거겠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기는 것은 이 지옥도의 근원인 시스템이 아니라 특정 계층이 된다. 이를테면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노오력’하는 것은 물론 그 이상의 짓도 벌일 수 있는, 필사적이고 절박한 사람들. <오피스>는 이 괴물에 대해 더 설명했어야 했다.

 강소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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