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탈출(The Great Escape)>은 2015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앵거스 디턴의 저서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출간되었는데 번역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출판사에서 책을 홍보하려고 <21세기 자본>으로 널리 알려진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와 일부러 대립 구도를 만들었고, 디턴이 전달하고자 한 주제와 무관하게 ‘불평등이 성장을 촉진한다’는 메시지를 억지로 만들기 위해 원문을 생략하거나 왜곡했으며 심지어 원문에 없는 내용까지 끌어다 붙이는 일까지 벌였다. 단순한 오역을 넘어서 아예 작정을 하고 원작을 딴판으로 뒤바꾸어버리는 것은 번역자의 커다란 과오다. 영국 사회를 비꼰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는 1993년에 완역본이 나오기 전까지 꼬마들이 읽는 동화로 치부돼 왔고 지금도 별반 다르진 않다. <걸리버 여행기>를 제대로 알려면 소인국 거인국 이야기인 1부와 2부뿐 아니라, 현실을 무시하고 이념 세계에만 몰두하는 지식인들을 비판한 3부와, 야수 같은 인간 본성을 고발하는 4부까지 읽어야 한다. 1908년에 청소년 잡지 <소년>을 창간한 최남선은 첫 호에 <걸리버 여행기> 앞부분을 발췌하여 번역해 실었다. 청소년의 기상을 드높인다는 명분으로 정치 풍자 소설을 청소년 모험 소설로 둔갑시켰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알려진 서양 격언은 고대 그리스의 의사인 히포크라테스가 ‘의술의 길은 먼데 사람의 생명은 짧도다’라고 탄식한 데서 비롯한 것인데 원래 맥락과 어긋나게 자주 인용된다. 선거철이 되면 여기저기 자주 인용되는 문구가 하나 있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한 말이라고 하지만 실제와 다르다. <국가> 제1권에 나오는 원문을 보자. ‘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경우에,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일세. 훌륭한 사람들이 정작 통치를 맡게 될 때는 그런 벌을 두려워해서 맡는 것으로 내겐 보이네’. 결국 훌륭한 자가 통치를 맡는다는 게 원래 맥락인 셈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메가라 강가에 기거하며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을 꾀어 하룻밤 묵게 하고 온갖 구실을 만들어 몸을 잘라내거나 늘려서 죽이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는 사실 왜곡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다.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최신 기술이 ‘현대의 프로크루스테스’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히틀러의 심복이자 나치의 선전장관이었던 괴벨스는 대중 심리를 선동하는 데 탁월했는데, 그의 손길을 거치면 사실 정보도 허위가 되고 거짓말도 진실이 되었다.
원작자가 일부러 감수한 왜곡을 곡해하여 악용한 사례도 있다. 네덜란드의 지도 제작자인 헤라르뒤스 메르카토르는 3차원 입체를 2차원 평면에 옮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왜곡을 감수했다. 경험이 부족한 항해사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지도를 만들고 싶었던 메르카토르는 그 단순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남극과 북극에 가까워질수록 커다란 왜곡이 발생하는 기이한 세계 지도를 1569년에 발표했다. 이 지도를 보며 항해를 하면 실제 거리보다 먼 거리를 돌아가는 셈이지만 길을 잃지 않고 쉽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지도에 적힌 글귀가 제작 의도를 잘 설명해준다. ‘항해용으로 적절하게 조정된 지구의 새롭고 좀 더 완전한 표현’. 세월이 많이 흘러 냉전 시대가 왔을 때, 메르카토르 지도는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서구 사회의 선전 도구로 자주 활용되었다. 극우 단체인 존 버치 협회는 소련과 중공을 진한 붉은색으로 물들인 메르카토르 지도를 배포했다. 극쪽으로 갈수록 넓게 과장되어 표현되는 메르카토르 지도 특성상 상단을 대부분 점령한 붉은 소련과 붉은 중공은 일반 미국인들에게 거대한 위협처럼 보였을 것이다. 괴벨스는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다음엔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두 믿게 된다’. 하물며 교묘하게 진행되는 왜곡 시도를 포착하기란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의지만 잃지 않는다면, 거짓에 휘둘리지 않고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다.

 이강룡 역사전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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