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와 8.15 광복 등 굴곡진 역사에도 한국의 자연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 과학자가 있다. 바로 한국과학기술원 정중앙에 있는 흉상의 주인공 이태규 박사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매년 한두 편씩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꾸준한 활동으로 많은 학자들의 귀감이 된 이태규. 그의 끊임없는 연구와 교육은 우리나라 화학계 성장에 큰 발판이 됐다.
1902년 출생한 이태규 박사는 1924년 교토제국대학 화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우리나라 실정상 박사 학위를 받기 쉽지 않았던 1931년, 그는 한국 최초로 화학계 이학박사 학위를 받아 큰 각광을 받았다. 더 넓은 학문을 익히기 위해 이태규 박사는 추후 미국 프린스턴대학교로 떠났다.
프린스턴대학교 객원과학자 시절, 이태규 박사가 발표한 흡착이론이 화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흡착은 유체가 고체 표면에 붙는 현상을 말한다. 이태규 박사는 유체가 고체 표면에 붙는데 어떤 힘이 작용하는지 깊이 연구했다. 그는 원자가가 포화되지 않은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고체 표면이 유체 분자와 접촉할 때, 불포화 표면 원자와 유체 분자간의 전자교환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다. 더불어 전자의 교환 작용이 약할 때 가역적인 물리흡착이 일어나고, 강한 경우에는 화학적 결합력이 작용하는 화학흡착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이후 양자역학을 이용해 자신의 가설이 옳다는 것을 증명했다.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하고, 이태규 박사는 고국으로 귀국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추진계획’을 두고 정치·이념적 대립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에 환멸을 느낀 이태규 박사는 프린스턴대학교 시절 동료과학자로 지냈던 헨리 아이링 교수가 있는 유타대학교로 떠난다. 유타대학교에서 이태규 박사는 헨리 아이링 교수와 함께 ‘리-아이링 이론’으로 알려진 비뉴턴 유동에 관한 연구를 발표한다. 리-아이링 이론은 이상적인 상태가 없어 다루기 어려웠던 액체에 대한 연구 중 특히 이론적 접근이 어려운 ‘비뉴턴 유동’에 대해 연구한 것이다. 비뉴턴 유동이란 뉴턴의 점성법칙에 따르지 않는, 물체의 변형 속도가 외부의 힘에 정비례하지 않는 유동이다. 갯벌에 빠졌을 때 나오려고 할수록 발을 빼기가 더 힘든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는 힘이 없을 때는 액체의 분자가 자유롭게 움직이다가, 힘을 가하면 갑자기 서로를 붙잡게 되어 유속을 떨어트리는 것이다. 이태규 박사는 이 같은 비뉴턴 유동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점도’의 일반 공식을 제시했다. 그의 점도 일반 공식은 기체상태에서 고체상태, 비결정에서 결정상태 등 여러 영역의 유변학에 적용됐다. 또한 이는 점성 물체의 흐름 성질을 연구하는 분자점성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태규 박사는 학자로서 모범을 보여 많은 후계 과학자들의 칭송을 받기도 한다. 이태규 박사는 광복 이후 부족한 과학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과학기술 진흥 설계안을 내놓고, 지금의 대한화학회를 설립하는 등 과학교육에도 힘썼다. 이상국(화학) 교수는 “학자의 본업은 학문을 연구하고 후계 과학자를 육성하는 것이라 말씀하시던 분이 당시 연구환경에서 꾸준한 연구와 교육을 실천해 진정한 학자의 귀감이 된다”고 전했다. 1992년 영원히 눈을 감은 이태규 박사는 한국과학기술원장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과학자로서 처음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나는 과학자이다>/대한화학회 저/2008/양문

<나는 과학자이다>/대한화학회 저/2008/양문


<나는 과학자이다>는 화학자 이태규 박사의 일생과 업적을 담은 전기이다. 이태규 박사가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맡았던 대한화학회에서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발간한 책이다. 책은 △화학의 길을 연 이태규와 그의 삶 △이태규 선생을 말하다 △언론에 비친 이태규 선생 총 3장으로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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