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으로 똘똘 뭉친 인턴 모집합니다”. 구직사이트에 들어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인턴 모집 공고다. ‘인턴’이란 회사에 정식으로 채용되지 않은 채 실습과정을 밟는 사원을 의미한다. 심각한 취업난 속, 청년들에게 장차 일하고 싶은 분야에서의 인턴경험은 필수적인 취업 준비 과정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절박한 상황을 이용해 제대로 된 직무교육이나 보수도 없이 노동력을 착취하는 기업과 기관이 많은 실정이다. 노동의 대가를 지급하지 않고 청년들을 착취하는 행태를 비꼬는 신조어 ‘열정페이’가 생긴지도 오래다. 교육과 경험이라는 명목으로 청년들의 젊음을 울리는 열정페이 인턴 제도에 대해 짚어봤다. |
한국외국어대 오수빈(국제통상학 12) 씨는 작년 겨울방학, 한 전시컨벤션센터에서 단기 인턴으로 일했다. 토익 850점 이상에 능통한 영어 회화 실력, 높은 학점까지 갖춰야 지원 가능했던 회사에 당당히 합격했지만 막상 일해보니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해외의 전시기획자들과 접촉해 전시를 유치하는 실무를 도울 것이라 기대했으나 처음 1주일 동안은 커피 심부름과 자료 복사만 했다. 상사의 개인적인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주5일, 하루 8시간 근무인줄 알고 지원했으나 실상은 야근 탓에 제시간에 퇴근할 수 있는 날이 드물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임금 40만 원. 교통비와 식비를 빼고 나니 남는 것도 없었다. 기대했던 정규직으로의 전환도 불가능했다. 이력서에 추가할 경험 하나가 생기긴 했지만,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얻은 것이 없는 것 같아 허탈하기만 하다.
청년 실업난 해소 위해 도입된 ‘인턴 제도’
실무 경험과 소위 ‘스펙’이라는 것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인턴제도. 미국에서 시작된 인턴 제도는 능력과 경험을 중시하는 미국 사회의 청년 구직 활동에 적합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임금과 근무시간 등에서 청년들이 법적으로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논란이 계속되자 미국 노동부는 근로기준법에 무급 인턴에 대한 규칙을 마련했다. 이 규칙에 따르면 인턴십 경험은 인턴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훈련기회를 제공하는 사용자가 인턴의 활동으로 어떠한 직접적 이득도 얻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에도 인턴 제도가 널리 퍼져 있다. 1980년대 ‘럭키금성’이 좋은 지원자를 가려내기 위해 최초로 도입한 인턴 제도는 IMF경제위기 이후 정부 주도로 바뀌었다. 어려움에 처한 기업을 돕고 실업난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양적인 지표 확대에 집중해 질적 관리에 문제점을 드러냈다. 경제가 회복되면서 2000년대의 인턴 제도는 사전 검증을 통해 우수한 인재를 채용하고, 채용 방식을 다양화하는 등 순기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문제는 2009년 이명박 정부 당시 청년 실업 해소를 위해 ‘청년 행정 인턴 제도’를 도입하면서 다시 시작됐다. 공공기관이 미취업 청년층을 인턴으로 채용하여 경력 형성 및 직무 향상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였지만 실패한 것이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우리나라 경제가 새로운 일자리 창출에 실패했고, 청년 실업이 계속 증가하면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 더욱더 많은 인턴이 생겨났다. 이렇게 2015년 현재의 열정페이 인턴 제도가 형성된 것이다. 청년 실업률이 11%대를 기록하는 상황에서, 간절한 취업준비생들은 ‘착취당해도 이력서에 한 줄 더 쓸 수만 있다면…’하는 심정으로 인턴에 지원하고 있다.
젊음 울리는 열정페이
취업을 꿈꾸며 인턴 생활을 하는 청년들은 모두 어려움을 호소한다. 기대했던 직무 경험을 쌓는 것은 고사하고 허드렛일만 해야할 뿐 아니라 정당한 대가마저 못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청년유니온이 인턴 경험이 있는 청년 23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청년 인턴의 평균 근로시간은 하루 8.8시간이었다. 비정규직이 8.4시간, 정규직이 7.4시간인 것과 비교하면 인턴은 정식 채용되지도 않았는데 일은 더 많이 하는 것이다.
<대기업·공공기업 인천 채용공고 분석 - 임금 등 근로조건> |
또한 인턴 채용 공고에 임금·근로시간 등 근로조건을 비롯해 세부 직무·채용 연계성 등 관련 정보가 명시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지난달 22일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는 국내 200대 기업 및 주요 공공기관의 인턴 채용공고 267건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에 따르면 △임금 △세부업무 내용 △인턴 종료 후 정규직 전환 여부 등 청년 구직자가 가장 관심 있어 하는 부분에 대한 정보 제공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대상 가운데 55.4%(148건)가 정확한 임금을 표기하지 않았다. 근로시간을 명시하지 않은 채용공고도 전체의 61.0%(163건)나 됐고 세부 업무를 명시하지 않은 경우는 58.1%(155건)로 조사됐다. 실제로 원하는 직무를 경험하기 보다는 커피 타기, 신문 가져오기 등 단순 업무만 해야 했다는 불평이 많은 상황이다. 채용공고에 근로조건 등을 명시하지 않는다고 해서 근로기준법을 위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불명확한 정보가 청년들의 열정 착취에 악용될 수 있어 문제가 된다.
특히 취업준비생에게 가장 중요한 ‘정규직 채용 기회를 얻을 수 있는지’, ‘채용 절차에서 가산점 부여 등 우대를 받을 수 있는지’ 등 채용과 연관된 정보를 제시하지 않은 경우도 34.5%(92건)에 달했다. 그나마 채용 우대를 명시한 채용공고(43건) 가운데도 가산점 부여, 서류전형 면제 등 구체적인 조건을 언급하지 않은 경우가 39.5%(17건)로 나타났다. 또 정규직 전환 조건을 명시한 기업의 인턴 채용공고 86건 가운데 전환 예정 인원을 정확하게 기재한 곳은 7.0%(6건)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인턴 채용 기관이나 회사들이 ‘채용 연계’가 아닌 ‘체험형’ 단기 인턴을 뽑고 있는 것이다. 특정 업무 체험을 조건으로 인턴을 모집했지만 실제로는 근무 조건이 상이한 경우도 많고, 정규직 전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도 다반사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모든 폐단이 사기업·공기업, 국내·해외를 막론하고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9월 정의당 심상정 대표가 공개한 <정부 해외인턴사업 현황파악 및 해외취업 연계를 위한 추진방안 연구>를 보면, 2011년부터 2013년까지 해외인턴사업에 참여한 2767명 중 2404명(87%)이 임금을 받지 않고 일했다. 심상정 대표는 “매년 200억 원이 넘는 세금을 투입하는 정부의 해외인턴사업이 실습인턴이라는 미명하에 청년들에게 열정페이와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청년 인턴 한 목소리 “더 이상은 못 참아”
부당한 처우가 계속되자, 정당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청년들이 직접 발 벗고 나섰다. 지난달 21일, 국회 인턴들은 노동조합인 ‘국회인턴유니온’을 발족했다. 이들은 국회에서 장시간 일하지만 최저임금 수준의 보수를 받고 있다고 호소했다. 국회인턴유니온은 “인턴의 빈번한 장시간 근무는 고려하지 않고 9년째 최저임금에 딱 맞춘 임금 규정이 인턴제도 도입 취지는 아닐 것”이라며 임금 현실화를 요구했다. 이들은 사용주인 국회 사무총장과의 교섭을 통해 제도 개선을 희망했다.
지난 3월에는 미용업 종사자들을 위한 ‘미용노조’가 생기기도 했다. 미용노조는 자신들의 페이스북에서 “기술을 가르친다며 열정페이를 요구하고 청년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착취를 끊어야 한다”며 “종일 서서 머리 손질 과정에서 다루는 화학물질로 고생한 대가를 받을 수 있길 바란다”고 밝혔다. 실무 체험이라는 명목 아래 최저임금도 보장받지 못한 채 일하는 것이 관례화된 미용·패션 업계에서도 노동실태를 고발하고 나선 것이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 지급’ 법제화와 인식 개선 필요해
전문가들은 좋은 취지로 시작된 인턴 제도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 대학이 모두 협력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인턴 제도가 ‘교육’이 아닌 ‘값싼 노동’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외국처럼 구체적인 기준을 관련법에 명시하고, 일시적인 정부 지원 대신 기업과 대학이 주축이 된 협력프로그램을 우선적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는 청년들의 착취를 막기 위해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것이라 밝혔다. 가칭 ‘인턴 활용 가이드라인’에는 임금, 정규직 전환 여부 등 청년 구직자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하도록 하는 규정이 담길 예정이다. 근로시간이나 노동 강도 등을 따져봤을 때 실질적인 근로자처럼 쓰면서도 인턴이나 수습이라는 이유로 임금의 일부만 주는 행위는 근로기준법에 위배된다고 판단, 사업주 고발이나 벌금 부과 등 엄정하게 대처한다는 방침이다.
대학생들이 현장 실습 과정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폐단도 사라져야 한다. 교육부는 지난 7월 <현장실습 운영지침> 제정안에 대한 공청회를 열었다. 제정안은 현장실습을 운영하는 대학이 관련내용을 교육과정에 의무적으로 반영하게 하고 학생들이 기업, 연구기관 등 교육기관에서 현장실습의 목적과 범위를 벗어난 업무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학생들의 실습시간도 제한된다. 현장실습을 1일 8시간, 1주당 40시간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연속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학생의 동의를 얻어 1주간 최대 12시간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규정들은 대학생들이 현장실습에서 근로기준법상 사용자와 근로자의 관계처럼 일하는 부작용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당시 교육부는 “<현장실습 운영지침> 제정으로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는 열정페이 문제 해결의 단초가 마련되고 산학협력 교육모델이 대학에 뿌리내리는 토대가 될 것”이라며 올해 안에 확정고시할 계획임을 밝혔다.
인턴 착취 문제가 심각해지자 여러 제도가 보완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현대의 젊은이들에게 인턴은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로계약서 미작성에 부당 임금, 인격 모독, 부당 해고 등 불합리한 일들이 사라져야 한다. ‘인턴은 쉽게 고용하고 해고할 수 있으며 임금을 많이 주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노동력’이라 여기는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착취는 근절할 수 없다.
이예슬 문화부장
yeslowly@pusa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