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일반 시민들과 학내구성원들이 효원산학협력관으로 모여 들었다. 우리 학교 박물관에서 개최한 ‘2015년 2학기 박물관 대학 교양강좌’를 듣기 위해서였다. 이날 강의에서는 창원대 구산우(사학) 교수가 ‘태풍(颱風), 동북아의 운명을 뒤바꾸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강의에 등장하는 ‘태풍’은 고려·몽골연합군(이하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을 두 차례나 좌절시켰다. 일본에서 가미카제(신의 바람)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강의 초입에서 구산우 교수는 “우리는 우리 민족이 많은 침략을 당했다는 내용의 역사를 배워왔다”며 “하지만 우리가 다른 나라를 침략한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비록 고려의 의지와는 무관했다 해도,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은 분명한 침략 행위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는 학계에서 사용하는 ‘원정’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구산우 교수는 “원정은 한국 학계에서 정복의 이미지를 숨기려고 사용하는 다소 비겁한 용어”라면서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한 침략, 침공이었고 이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구산우 교수는 원정의 역사적 배경과 진행과정을 설명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강압에 의해 일본원정에 동참했다. 1274년 10월 3일, 여몽연합군의 전함 900척이 합포에서 출항했다. 구산우 교수는 “영화 <명량>을 보면 알 수 있듯 900척 규모의 함대는 것은 어마어마한 규모”라며 “이 중 300여 척은 대형 전함이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일본군 무기와 전술체계는 여몽연합군보다 열세에 있어 승리를 점치기는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10월 21일에 갑작스러운 폭풍이 일어나 정박 중이던 여몽연합군을 덮쳤다. 구산우 교수는 “항구에 있던 배들이 서로 부딪혀 부서지고, 고려군 좌군사 김신이 익사할 정도로 엄청난 태풍이었다”라고 전했다. 이 태풍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여몽연합군은 황급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차 원정이 실패한 이후 원나라는 2차 원정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여몽연합군 외에 남송의 한족들로 구성된 강남군까지 동원되어 전체 원정군의 규모는 10만 명 이상이었다. 1281년 5월에 시작된 여몽연합군의 2차 원정으로 일본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찰나, 또 다시 ‘신의 바람’이 불어왔다. 구산우 교수는 “음력 7월에서 윤7월 사이에 있었던 폭풍으로 여몽연합군은 전력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다”며 “태풍이 그친 이후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괴멸 당했다”고 전했다. 전함도, 병력도 거의 돌아오지 못했다. 2차 원정의 참패 이후 원나라는 일본원정을 포기했다.
일본원정을 실패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인 태풍. 이것은 정말로 신이 일본을 돕기 위해 일으킨 것일까?흥미롭게도 1차 원정군이 태풍을 마주했던 음력 10월 21일은 강력한 태풍은 일어나기 힘든 시기라는 것이 구산우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태풍 발생에 대한 통계자료를 봤을 때, 11월 말 경에 강력한 태풍이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며 “그렇기에 일본에서도 이를 가미카제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한편 두 차례에 걸친 일본원정은 일본과 고려 양국 모두에게 상처를 남겼다. 고려는 전쟁 준비를 위한 막대한 부담을 짊어져야 했고, 인명 손실도 입었다.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도 전쟁의 공포는 남아 있다. 구산우 교수는 “일본에서 아이를 달랠 때 ‘무쿠리 고쿠리 온다’는 표현을 사용한다”며 “이는 몽골군과 고려군이 온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구산우 교수가 스크린을 보며 고려몽골연합군의 일본정벌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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