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칠 수 없는 연극이 인생이다. 누가 자기 앞의 생을 예측할 수 있을까.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타인이다. 로맹 가리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그는 1956년 <하늘의 뿌리>로 신인들에게만 주어지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콩쿠르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작가의 말년은 쓸쓸했다. 독자들에게 잊히면서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로맹 가리는 환갑기념으로 다시 태어난다. 에밀 아자르라는 1975년 <자기 앞의 생>으로 콩쿠르상을 수상한다. 프랑스 전역은 천재 작가의 탄생이라며 환호한다. 에밀 아자르는 <그로칼랭>, <가면의 생> 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그러던 중 노년의 작가 로맹 가리는 1980년 입 속에 권총을 물고 자살한다.
한물간 작가 로맹 가리는 유서를 통해 에밀 아자르가 자신의 필명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또 다른 자아 에밀 아자르로 활동한 로맹 가리는 문학사에 기록될 만한 사기꾼이었을까. 아니면 한 인간에 대한 편견과 세상의 고정 관념에 대한 경종을 울린 것일까. 혹시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려는 작가의 처절한 몸부림은 아니었을까. 소설 <자기 앞의 생>은 그렇게 탄생한 소설이다.
열네 살의 아랍계 소년 모모가 이 소설의 화자다. 모모의 어머니는 창녀였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인 후 정신병자로 병원에 갇혀 지낸다. 유대계 창녀 출신 로자 아줌마는 실수로 태어난 아이들을 돌봐주면서 생활하다가 노화 현상과 치매로 죽음을 맞이한다. 주인공 모모를 비롯해서 주변 인물들은 지독한 불행의 최전선에 서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결코 어둡지 않다. 서술자인 모모의 눈에 비친 사람과 세상이 경쾌하고 위악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의 조건을 선택할 수 없다. 태어날 국가, 부모, 지역, 경제적 환경 등 출발부터 평등한 인생은 없는 것이다. 모모도 마찬가지다. 로자 아줌마는 말할 것도 없다. 자기 앞에 놓인 생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타인과의 관계였으리라. 피부색도 다르고 인종도 다르지만 이들의 삶을 유지하는 유일한 버팀목은 서로에 대한 애증이다. 모모와 로자는 아이와 어른, 젊음과 늙음, 아랍인과 유대인 등 서로 대립적인 요소로 가득하다. 둘은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관계지만 소설은 따뜻한 비극으로 끝난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공포로 치매 증상을 겪는 로자 아줌마는 서서히 비참하게 죽어간다. 로자 아줌마의 시체 곁에서 3주를 보내면서 모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소설의 말미에 빅토르 위고를 좋아했던 하밀 할아버지가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을 떠올렸을까.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서로의 불행을 경쟁하듯 한다. 창녀, 고아, 동성애자 등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러나 타인의 불행이 나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다. 자기 앞에 놓인 삶은 각자의 몫이다. 아무리 가난하고 비참한 삶일지라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으며 ‘사랑’만이 인간의 삶을 이끌어 준다는 뻔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이 소설을 읽을 필요는 없다. 소설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을 살고 있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자기 앞의 놓인 생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문제는 나와 타인의 관계이다. 자기 앞의 생과 타인의 삶이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문제는 ‘너’의 문제와 닿아있다. 그것은 ‘우리’의 문제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소설 같은 현실들, 현실 같은 소설들을 통해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는 행복한 이기주의자의 삶이 아니라 변화와 실천을 위한 노력이다.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 하지만 내가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눈앞에 놓인 이익과 나 혼자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결코 ‘희망’이나 ‘행복’을 지속시켜 줄 수 없다. 그래서 100년 전에 태어난 에밀 아자르는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를 선택했는지 모르겠다. 사랑은 자기기만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통해 자기 앞의 생을 돌아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류대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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