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학내에서 故 고현철 교수를 추모하고, 총장직선제를 찬성하는 내용의 현수막 수십 개가 훼손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현수막에 자극적인 문구를 적고, 찢기도 했다. 학내 게시물이 훼손된 것은 비단 이번만이 아니다. 총학생회와 성소수자 인권 동아리의 게시물이 훼손된 사례는 앞서 <부대신문>에서도 다룬 바 있다.
표현물의 훼손은 그 중간의 의사소통 과정을 모두 생략해버린 채 오로지 훼손으로만 반대를 나타낸다. 왜 반대하는 것인지에 대한 이유나 대안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타인의 표현을 억제하거나 차단함으로써 자신의 분노를 발산하고 폭력적 만족을 누린다는 것이다. 이는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결정을 강압적으로 강요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당사자의 의견 수렴과정을 도외시한 노동개혁과 구조조정 등에는 불협화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당사자의 의견을 묻기보다 공권력을 통해 단체나 개인의 요구를 묵살하거나 억압하기도 한다.
때로는 의견 소통의 창구가 되어야 할 언론에서조차 진정한 의사소통의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종이신문에 대한 신뢰도만큼이나 공영방송에 대한 신뢰도도 바닥을 친다. 이러한 낮은 신뢰도의 근간은 보도해야 할 것을 보도하지 않거나, 지나친 과장 또는 허위 정보 때문일 것이다. 언론도 하나의 의사소통 창구이거늘 권력을 가진 이들과 결탁하고 있기에 담아야 할 목소리를 담지 않기도 한다. 지금의 언론은 중요하게 논의해야 할 의제를 개진하는 데는 인색하고 종종 색깔론에 입각한 기사를 생산해낸다. 현재 수많은 인터넷 언론이 난립하고 있지만, 그들의 행태 역시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러다간 다가올 미래에 현재와 같은 언론과 기자라는 기능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노동의 종말>에서 제레미 레프킨이 미래에는 기자라는 직업이 기계에 의해 대체될 것으로 보지 않았던가. 기사 작성이 지금과 같이 기계적인 반복에 가깝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민주주의의 이상향을 얘기하면서 우리는 흔히 아고라에 대해 얘기한다. 모두가 자유로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일종의 이데아와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현재 아고라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터넷을 통해 실현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인터넷 강국인 우리나라가 온라인상의 명예훼손 문제, 유언비어 살포, 댓글을 통한 여론 조작 등의 사회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쌍방향의 소통이 이뤄 진다기 보다는 서로 비방하거나 또 다른 흑색선전이 이뤄지는 장으로 변질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자보를 쓰고, 현수막을 걸어 자신의 입장을 알리는 것이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고공농성을 통해서 자신의 의견을 알리려고도 한다.
학내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사소통의 부재에 대해 몇몇 개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이들의 행태를 묵과해주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우리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태도와 판단이 오늘날 사회의 주춧돌이 된다. 사회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수많은 개인들이 모여 사회를 구성함은 분명하다. 이 수많은 개인들의 유기적 결합체가 사회인만큼, 어떤 사회에서 살아갈지는 우리 개개인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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