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가 함석헌

   
 (일러스트=박유현)

전태일 열사가 분신자살로 세상을 뜨고, 그의 집을 가장 먼저 찾은 이가 있었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안심시키던 그 . 바로 민중, 시민, 국민의 편에 서서 역사를 바라봤던 사상가 함석헌이다.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양시공립소학교와, 평양고등보통학교에 다녔다.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젊은 함석헌에게 3.1운동은 인생의 큰 전환기였다. ‘3.1운동 전까지는 평범한 기독교인에 불과했다’고 자평할 정도로 그에게 3.1운동은 종교인의 사회참여 의무를 마음속 깊게 깨닫게 한 계기가 됐다.
함석헌은 무교회주의를 표방하여 기독교의 종파적인 울타리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려 했다. 함석헌은 1927년 무교회주의적 기독교 동인지 <성서조선> 창간에 참여해 한국 최초의 통사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시리즈를 연재했다. 훗날 이 책은 <뜻으로 본 한국 역사>로 재탄생되기도 한다. 해당 책은 핍박과 억압 속에서 묵묵히 역사를 만들어 온 민중들의 정당한 의미를 되찾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민중이 나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아 치안유지법을 위반해 수감됐다.
투옥생활 함석헌은 성서뿐 아니라 동서양의 고전을 폭넓게 수용하여, 해방 후에는 기독교를 넘은 범 종교적인 시선을 갖게 됐다. 그의 이러한 시선은 곧바로 행동으로 나타났다. 함석헌은 기독교인에게만 원조를 해주는 기독교 편파적인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 또한, 박정희 정권 때는 경제 제일주의에 자연이 훼손되는 것을 막고자 노장사상을 사상적 무기로 독재 정권에 맞섰다. 이처럼 함석헌은 모든 종교의 근본이 같다고 여겼다. 어느 한 종교나 이념의 ‘우수성’을 주장해 다른 종교나 이념에 배타적이고 편파적인 태도보다는 포옹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포용 정신은 민주주의에 기여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함석헌 평전 김성수 저자는 “함석헌 선생의 포용 정신은 민주주의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말했다.
함석헌의 종교와 이념을 떠나 민중을 위한 정신은 그가 사용한 단어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민중이나, 국민이라는 말 대신 순우리말 ‘씨알’을 썼다. ‘씨알’이라는 말은 한자어와 달리 낡고 오염되지 않은 말인 데다가 폭넓은 의미를 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함석헌의 ‘씨알’ 사상은 비폭력, 민주, 평화를 가치에 두고 민중 계몽의식과 민중 사상에 확립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깨어있는‘씨알’이 기적을 일으켜 직접 시대를 새롭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함석헌은 진지한 종교인이면서 사회정의에도 민감했고, 항상 약자의 편에 서려 했다.
‘한국의 양심’, ‘한국의 간디’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던 함석헌은 1989년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된다. 이후 2002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현재는 대전 현충원에서 그를 찾을 수 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 저/2003/한길사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 저/2003/한길사

이 책은 역사를 고난이라 칭하는 함석헌의 사상이 담긴 한국 최초의 통사이다. 저자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쓴 것이라 말하지만, 여러 종교와 사상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무엇보다 역사의 중심에 ‘씨알’, 민중을 주인공으로 삼은 함석헌의 뜻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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